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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참을 때와 나설 때

입력
2017.09.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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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화끈하게 미국 편을 들었어야 했다.”

지난달 9일 북한이 괌 포위사격을 위협했을 때다. 정부 관계자는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적지근하게 대응하면서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당시 청와대는 북한을 향해 긴장 고조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하는데 그쳤다. 영토가 김정은에게 볼모로 잡힌 사상 초유의 상황에 처한 미국의 불안감을 반영한 표현은 없었다.

대신 “동맹국 미국에 대한 위협은 반드시 응당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우리가 발벗고 나섰더라면 어땠을까. 명분도 충분하다.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어느 쪽이든 먼저 공격 당하면 군사적으로 자동 개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립 서비스에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변덕이 죽 끓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라면 사정은 다르다. 한미동맹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기에 이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는 없을 테니까.

문 대통령이 머뭇대는 사이, 북한이 연달아 초대형 도발에 나서면서 한미공조에 쇳소리가 날 지경이다. 보란 듯이 일본의 머리 위로 탄도미사일을 쏘더니, 6차 핵실험 버튼마저 거침없이 누르며 미국과 일대 일로 맞붙자고 덤비고 있다. 베를린 구상을 발판으로 링 안에 들어와 싸움을 말리겠다던 문 대통령은 다시 관중석으로 밀릴 판이다. 김정은이 사고를 치면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먼저 전화통화하고 문 대통령은 순서를 기다리는 장면은 이제 낯설지도 않다.

북한의 화성-14형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이라는 정부의 판단 또한 미국과의 혼선을 부추기고 있다. 미국은 ICBM으로 부르는데, 우리는 굳이 ‘급’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북한의 위협수위를 애써 낮추고 있는 탓이다. 2인3각 달리기에서 미국은 맹렬히 뛰어가려는데 우리는 주저 앉아 발목을 잡고 있는 것으로 비치니 미더울 리 없다. 군 소식통은 “미 측에서 여러 채널을 통해 우리 정부의 용어 사용에 강력 항의했다”고 귀띔했다.

줄곧 화를 삭이던 문 대통령은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자 “강력한 응징능력을 과시하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처음 꺼낸 카드가 공군 전투기에서 떨어뜨린 MK84 재래식 폭탄이다. 한발에 500만원이라고 한다. 모든 무기에는 저마다의 용도가 있다지만 보는 이들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슬램-ER(18억원), 타우러스(20억원)로 뒤늦게 미사일 대응수위를 높였지만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김정은의 기세를 제압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대통령을 붙잡아두기엔 이미 타이밍이 늦었다.

돌이켜보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과정부터가 화근이었다. 엉뚱하게 치고 나간 탓이다. 외교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은 천성이 부동산 개발업자라 환경단체를 가장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런 트럼프를 상대로 성주 골프장 환경영향평가를 들이밀었으니 문 대통령과 제대로 속을 터놓기나 할지 의문이다. 북한의 핵ㆍ미사일 도발이 격해지면서 뒤늦게 골프장 안에 떠밀 듯 집어 넣은 사드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지 오래다.

그 결과 트럼프의 이중플레이는 도를 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폐기한다며 뒤통수를 치고, 트위터 글로 문 대통령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조롱하는 건 그나마 감내할 수 있는 술수에 가깝다. 미국산 무기 구매,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인상 등 앞으로 청구할 안보비용은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다. 급기야 전술핵 재배치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젖히며 문 대통령을 향해 윽박지르는 형국이다.

밥을 지을 때 배고프다고 냄비 뚜껑을 일찍 열면 설익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면 바닥에 늘어붙기 십상이다. 전기밥솥이 알아서 해주면 좋으련만 한반도의 운전대를 잡고 거친 황야를 누비는 마당에 그런 여유를 부릴 처지가 아니다. 문 대통령의 절묘한 손맛이 어떨지 궁금하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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