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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언어의 처리 너머에서

입력
2017.05.25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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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내가 아홉 개의 교향곡과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최후의 심판’을 순전히 혼자서 이룩해냈다 치더라도, 너는 영원히 나를 비웃을 권리가 있다”(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토니오 크뢰거는 어느 정도 작가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예술의 근원적 나약함과 한계를 고통스럽게 의식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독설은 신랄하다. “한번 말로 표현된 것은 이미 처리된 것이다—이것이 그의 신조입니다. (…) 글쟁이가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삶은 그것이 말로 표현되고 ‘처리되었다’ 해도 (…) 계속 영위될 거라는 사실이지요.” 별 대단치도 않은 명성을 대가로 고독과 우울을 양식 삼아 그 잘난 예술가, ‘길 잃은 시민’의 운명을 살아간다는 것은 또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어릴 적 그가 사랑하고 흠모했던 이들이 행복한 커플이 되어 춤을 추는 모습 앞에서 예술가의 운명은 초라해지고 탄식은 깊어진다. 밝은 시민적 삶으로부터의 거절, 사랑의 외면은 그 어떤 예술적 성취로도 보상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토니오 크뢰거가 북구의 해변에서 쓰는 편지는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시민적 사랑’의 간절한 마음의 행로를 드러낸다.

이런 시민적 사랑의 고백이 현실에 대한 문학의 순응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다. 오히려 초월과 관념의 유혹을 밀어내면서 세속의 현실, 인간의 생동하는 욕망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태도에 가깝지 싶다. 그러나 예술성과 시민성의 화해는 쉽게 마련되지 않는데, 그 아픔은 유리 베란다에서 몰래 홀 안의 밝은 행복을 훔쳐보는 토니오 크뢰거의 쓰라린 자세에 새겨져 있다. ‘아홉 개의 교향곡…’을 비웃을 권리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든 통쾌하다. 그러나 사랑스럽기로는 “내가 작품을 써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너희들이었어”라는 고백만큼은 못한 것 같다.

필립 로스의 장편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김한영 옮김, 문학동네)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어 닥친 1950년대 초반 미국을 배경으로 아이라 린골드라는 공산주의자가 겪은 격렬한 상승과 추락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화자ㆍ청자의 특별한 설정은 필립 로스 소설의 주제를 복합적 층위에 올려놓는 장치이기도 한데 이 소설 역시 그렇다. 아흔에 이른 아이라 린골드의 형, 머리 린골드가 동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로 등장한다.

네이선이라는 청자는 아이라를 우상으로 따랐던 인물로, 머리 역시 그가 평생 존경해온 고등학교 영어 선생이기도 하다. 작가인 네이선이 은거하고 있는 시골 별장에서 진행되는 ‘엿새간의 야화’가 끝날 무렵 우리는 끝내 자신의 삶을 찾지 못하고 파멸에 이른 동생의 이야기만큼이나 한 가족의 책임 있는 장형으로서, 성실한 교사로서,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시민으로서 자신의 삶을 지켜온 머리의 텅 빈 일생 앞에서 망연자실해진다.

그는 동생 때문에 해직되기도 했지만 복직 후 슬럼화한 동네의 교직과 집을 지키다 아내를 잃는다. “내가 살아오면서 노력했듯, 종교,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같은 명백한 망상에서 자신을 해방시켜도, 여전히 자신의 선량함이라는 신화는 족쇄처럼 남는다네. 그게 최후의 망상이지. 또 내가 도리스를 희생시키게 만든 망상이고.” 청자인 네이선은 말을 아낀다. 그가 어린 시절의 우상을 좇다가 돌아서야 했던 이야기며, 그의 삶을 인간들의 관계로부터 떼어놓은 환멸의 이야기는 삼켜져 있다.

우리는 아이라의 삶에 대한 ‘언어의 처리’ 너머로 두 사람의 거의 말해지지 않은 인생을 생각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문학은 언어의 처리 너머에서 삶이 지속된다는 것을 아는 아이러니 안에 있다. 문학의 언어가 끝내 오만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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