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삶과 문화] 우리 더 자주 포옹할까요?

입력
2017.05.21 15:12
0 0

사춘기 아들의 엄마 노릇은 참 힘들었다. 쉴 새 없이 종알대던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말수가 줄더니 무얼 물으면 못 들은 척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터에 있기 일쑤였던 나는 아이와 주로 전화로 이야기를 했는데 중 2가 되면서는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물론 내가 하는 말이 주로 “숙제 했냐” “학원 늦지 마라” 같이 듣기 싫은 말들이거나 “밥 먹었냐” “학교에서 별 일 없었냐”처럼 제가 다 알아서 할 수 있는 것들이라 그랬을 것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화가 끓어오르면 저녁 회의를 뒤로 미루고 집에 달려가 아이를 닦달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미 나보다 더 크고 힘이 세서 때려줄 수도 없으니 약 오른 내가 할 수 있는 응징은 온갖 못된 말로 아이 자존심을 박박 긁어 놓는 일이었다. “너랑 똑같은 놈 낳아서 고생 좀 해 봐라”는 악담도 고정 레퍼토리였다.

한 번은 수학 공부에서 시작된 잔소리가 늦잠과 밥 깨질거리는 데까지로 비약해서 험악한 전투가 벌어졌다. 학원을 자체 휴강하고 낮잠까지 푹 자서 기운 넘치는 녀석과 야근으로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 싸우려니 힘에 부쳐서 내가 말했다.

“힘이 들어 야단도 더 이상 못 치겠다. 나가서 너 혼자 살아. 우리 그만 헤어지자.”

“엄마랑 아들이 어떻게 헤어져요? 저 나가면 엄마는 바로 후회할 거잖아요.”

“아냐 너 땜에 맨날 이렇게 속 썩이느니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게 낫겠어.”

녀석은 심각한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었다. 슬그머니 미안해졌다.

“맞아, 사실 네가 나가면 엄청나게 후회할 거야. 안 나가 줘서 고마워.”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며 아이를 포옹했다. 훌쩍 자라 키가 180cm쯤 되는 녀석은 등을 구부리고 어색하게 엄마한테 안겼다. 마음이 풀렸는지 포옹을 풀며 녀석이 하는 말, "아휴 난 맨날 엄마 안아 줘야 돼…” 그랬던 건가? 내가 안아준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지가 엄말 안아준다고 여겼던 거다. 다시 한 번 아이를 안는데 노여웠던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안고 있으니, 아니 아이에게 안겨 있으니 그깟 공부쯤 못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옹이 부린 마술이다.

몇 해 전 방송된 초코파이 TVCM은 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말없이 안아 주고 업어 주고 수줍게 초코파이를 건네는 다양한 사람들 모습 위로 카피가 흐른다.

NA) 나는 나라를 지킬 수 없습니다

좌절에 빠진 사람을 도울 수도 없습니다

지혜를 줄 수도 아픔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과 마음을 함께하는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하나는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위로가 됩니다

때론 용기가 되고 때론 감사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도 누군가가 다시 미소 짓고 힘낼 수 있도록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나는 당신의 정(情)입니다

(오리온 초코파이 TVCM 2016년 6월_카피)

정을 설명했는데 마치 포옹의 속성을 묘사한 것처럼 들렸다. 이 광고를 보며 정을 나누는 가장 쉽고 돈도 안 드는 좋은 방법은 포옹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전, 5ㆍ18민주화운동기념식에서 내 생애 가장 감동적인 포옹을 목격했다. 당시 총격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읽은 뒤 울먹이며 들어가는 김소형씨를 따라가 안은 대통령의 포옹! 들먹이는 그녀의 어깨와 눈물을 훔치는 수화통역자 그리고 젖어 있는 대통령의 얼굴이 나를 울게 했다. 포옹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이 좋은 걸 왜 그리 보기 힘들었을까? 슬픈데 고맙고, 아픈데 기쁘고, 억울한데 벅찼다. 대통령 참 잘 뽑았구나, 으쓱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좀 생뚱맞은 결심을 했다. 이제 사는 동안 포옹을 아끼지 않으리라. 최대한 자주, 많이 포옹하리라. 우선 이제는 다 커버린 아이부터 당장 안아줘야겠다.

(오리온 초코파이 TVCM 2016년 6월_스토리보드)

(오리온 초코파이 TVCM 2016년 6월_유튜브 링크)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