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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약 사이다’ 할머니 유죄 판결에도 진범 논란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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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약 사이다’ 할머니 유죄 판결에도 진범 논란은 계속

입력
2015.12.1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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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 국민참여재판이 실시된 7일 오후 대구지방법원에서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 기소된 박모 할머니가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대구=뉴시스
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 국민참여재판이 실시된 7일 오후 대구지방법원에서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 기소된 박모 할머니가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대구=뉴시스

경북 상주 한 마을회관에서 사이다에 맹독성 농약(메소밀)을 넣어 6명을 죽이거나 중태에 빠지게 한 혐의(살인 및 살인미수)로 기소된 박모(82) 할머니에게 11일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하지만 박 할머니의 가족이 1심 판결에 반발, 항소할 뜻을 밝혀 논란은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재판부는 박 할머니의 자백이나 목격자 등 직접 증거가 없지만 정황 증거를 유죄 판단의 근거로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검찰은 재판에서 박 할머니가 사건 전날인 7월 13일 피해자들과 화투놀이를 하다 심하게 다투고 사건 당시 피해자들과 함께 마을회관에 함께 있었지만 혼자 사이다를 마시지 않은 점, 박 할머니 집에서 농약이 들어간 박카스병이 나온 점, 박 할머니 옷과 전동휠체어, 지팡이 등 21곳에서 메소밀이 검출된 점, 피해자들이 농약 사이다를 마시고 입에 거품을 물고 복통을 호소했지만 50여분간 구조 노력을 하지 않은 점 등을 유죄의 증거로 제시했다. 검찰은 “피해자들도 원인을 모르던 사건 발생 당시에 박 할머니가 이장을 만나자마자 ‘사이다를 먹고 저렇게 됐다’고 말한 점을 봐도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며 “범행 도구, 범행 흔적이 있고 제 3자가 범행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봐도 박 할머니가 범인임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박 할머니 변호인은 수십년간 친하게 지낸 이웃을 살해할 동기가 없고 각종 정황 증거가 검찰의 과도한 추측에 따른 것이라고 반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 할머니 가족들은 재판이 끝난 후 “재판에서 수사당국이 제출한 증거 중 유죄 입증 증거로 채택될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며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선고 결과에도 불구하고 진범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는 이유는 박 할머니의 살인을 직접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없고, 정황 증거만 있기 때문이다. 정황 증거는 간접 증거의 하나로 범죄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데 이용되는 증거다. 범인의 자백이나 범행 현장이 직접 찍힌 폐쇄회로(CC)TV 화면 등은 직접 증거에 해당하고, 범행 현장이나 도구에 남아 있는 지문은 정황 증거다.

변호인 측은 박 할머니 옷 등에서 검출된 메소밀 성분은 피해자의 입을 닦아주는 과정에서 묻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침에서 메소밀이 묻어나올 가능성이 낮다는 소견과 함께 피해자들의 침을 닦았다는 옷이나 걸레 등에서 피해자들의 유전자정보(DNA)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감식 결과를 내놓았다.

살인 사건에서 정황 증거에 의한 법원의 판단은 일반적이라는 의견이 많다. 대개 은밀하게 발생하는 살인 사건의 경우 자백이나 목격자 진술 등 직접 증거가 확보되는 경우가 드물어 정황 증거에 의해 범죄가 입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재경지법 판사는 “정황 증거를 부인하려면 논리칙과 경험칙에 따라 배제해야 한다”며 “예를 들면, 박 할머니의 옷 등에서 농약 성분이 나온 것에 대한 변호인의 주장은 검찰측 주장을 합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논란이 계속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박 할머니의 범행 동기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찰은 사건 전날 화투놀이를 하다가 다툰 점을 범행 동기라고 주장하지만 일각에서는 화투놀이를 하다 다투는 경우가 흔한데 이를 여러 명을 동시에 살해하려 한 이유로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박 할머니는 최후 진술에서 “친구들 죽으라고 나이 많은 할머니가 농약을 넣을 수는 없다”며 검찰이 내세운 범행 동기를 부인했다.

더구나 재판부마저 박 할머니의 범행 동기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논란을 키우고 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살인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동기는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쌓여 만들어질 수 있다”며 “화투놀이 때문에 싸웠다는 이유 하나를 범행 동기로 보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때문에 항소심에서 결과가 뒤바뀔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황 증거는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배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일 가전박람회에서 삼성전자 세탁기를 파손한 혐의(재물손괴 등)로 기소된 조성진 LG전자 사장이 무죄가 선고된 것이 대표적 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부장 윤승은)는 11일 조 사장이 세탁기를 만진 것은 인정했지만 그로 인해 세탁기가 파손됐다거나, 조 사장이 세탁기를 파손시킬 고의가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합리적 의심이 배제될 만큼 입증되지 않았다”며 검찰 주장을 배척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을 두고도 뒷말이 나온다. 한 법조인은 “발생 때부터 언론을 통해 사건에 대해 접한 배심원들이 편견을 갖고 재판에 임했을 가능성도 있다”며 “피고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단한다는 형사소송법상 원칙에 따라 항소심에서는 정황 증거를 배제하고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안아람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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