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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보다는 긴 문장

입력
2018.08.1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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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 하는 글쓰기 수업이 끝나면 마음이 홀가분하다. 수업하기 전 며칠 동안은 조금 긴장한 상태로 지낸다. 실제 수업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음이 드러나게 되는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수강생들의 과제를 첨삭하고, 그런 일들을 마치고 나서도 여전히 할 일이 남은 듯, 계속 서성이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일까. 수업이 끝난 직후에는 버스 정류장 몇 개를 지나치면서 밤거리를 오래 걷는다. 편한 마음으로 부질없는 질문과 대답들 속에 잠긴 채.

지난 번 수업을 마치고 나서는, 덕수궁길을 따라 시청역 쪽으로 걸었다. 그러면서 그날 내가 했던 수업 내용을 되새겨 보았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사람이나 사물, 혹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단어 하나로 설명하려 애쓰는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는 것. 무례한 이웃, 아름다운 여자, 이렇게. 그러나 하나의 수식어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제대로 표현하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단어는 그저 이름일 뿐이고, 이름을 붙이는 행위에는 나와 세상을 분리하려는 의도도 있다는 것. 예컨대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그러니까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저것은 예쁜 그릇이다, 그러니까 나는 예쁜 그릇이 아니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라는 식으로. 그런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세상을 더 잘 설명하고 이해하려면 단어에서 문장으로 문장에서 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구체적이고 섬세한 문장을 쓰는 일은 분리시켰던 세상과 나를 다시 연결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날 나는 시청역 앞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 노동자 고 김주중 씨의 분향소로 함께 조문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역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면서, 지난 1월 이후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가늠해 보았다. 그 이전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 사람들이 있고, 그로 인한 억울함과 괴로움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된 사람들이 있음을 알아도, 그리고 내가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다고 해도, 굳이 직접 애도를 표하러 조문을 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1월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글쓰기 강좌 수강생 가운데 유독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었다. 글을 풀어내는 솜씨도 솜씨려니와 글의 내용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이런 사람이 왜 수업을 받으러 왔을까. 내가 배워도 시원찮을 판인데... 실제로 그가 써낸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겪은 온갖 풍상과 소회를 읽으면서, 오히려 가르치는 입장인 내가 배우는 게 많았다. ‘노동자’ 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르던 생경함, 전태일 열사 같은 이미지가 깨졌을 뿐 아니라, 나는 성취한 게 없어서, 나이도 많고, 인맥도 없고, 가난해서, 라는 온갖 변명으로 가둬 놓은 소극적 삶이 부끄럽기도 했다.

분향소 정면 벽에 걸려 있는 서른 명의 영정을 바라보면서, 검게 지워진 얼굴들 아래 적혀 있는 짧은 글을 읽어 보았다. 2011.10.10 희망퇴직자. 심각한 우울증, 집안에서 목매 자살. 2012.1.21 희망퇴직자. 심장마비 사망, 회사 측에 의한 2번의 해고. 2018.6.27 복직대기자. 생계곤란, 정리해고 이후 기부간부 역임, 복직 투쟁에 적극적으로 활동, 해고자 복직 길어지자 자택 근교 야산에 목 매 자살. 얼마 되지 않는 단어들로 설명되어 있는 삶이 슬펐다. 그 삶의 주인들은 물론 그보다는 긴 문장으로 자신이 기억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향을 피우고 절을 하면서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기원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가 좀 더 일찍 서로를 알았더라면, 그토록 단순한 단어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고.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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