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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명, 택시비 무료” 전직 소방관의 특별한 '행복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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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명, 택시비 무료” 전직 소방관의 특별한 '행복택시'

입력
2017.10.24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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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경기 용인시에서 만난 '행복택시' 기사 이상설씨. 고가혜 인턴기자
지난 18일, 경기 용인시에서 만난 '행복택시' 기사 이상설씨. 고가혜 인턴기자

“기사님, 이 차 행복택시 맞죠?”

지난 18일 오후 1시, 경기 용인시 명지대역 1번 출구 앞 한산한 도로 가에 하얀 택시 한 대가 정차한다. 승객을 태우자마자 이내 ‘빈 차’라는 표시등이 꺼진다. 운전석에는 이제 택시 운전을 한 지 막 1년이 된 새내기 기사인 이상설(63)씨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외관은 평범한 택시인데, 안에 비치된 물품이 심상치 않다. 조수석에는 무전기가 부착돼 있는데, 위급 상황 시 용인소방서로 곧장 연결된다. 트렁크는 만일에 대비한 심장 제세동기와 소화기 등 각종 구조장비로 가득하다. “도대체 택시에 이게 다 무엇이냐”고 묻자 이씨는 “퇴직소방관 출신이라 안전 감각이 남다른 편이다”며 “이 택시는 작은 소방차나 다름없다”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이씨가 택시에 비치된 심장 제세동기와 각종 구조장비 등을 설명하고 있다. 고가혜 인턴기자
이씨가 택시에 비치된 심장 제세동기와 각종 구조장비 등을 설명하고 있다. 고가혜 인턴기자

이씨의 택시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하루 한 번, 무료로 승객을 태운다는 점이다. 공짜 택시 탑승의 행운을 거머쥐는 승객은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이다. 얼핏 보면 대중없이 무료 승객을 선정하는 것 같지만, 이씨가 ‘행복택시’에 승객을 태우는 기준은 명확하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어린 학생이 1순위, 임신부나 노인 등 거동이 힘든 사람이 그 다음이다. 그렇게 행복택시의 기쁨을 누린 이가 지난 1년 동안 100여 명에 이른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행복택시가 알려지다 보니 “이 차 공짜죠?”라며 타려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그럴 땐 “모든 사람을 공짜로 태우는 게 아니라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동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그래도 취지를 설명하면 대부분은 이해를 해주고 기꺼이 요금을 낸단다.

퇴직 전 용인소방서 소방공무원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 고가혜 인턴기자
퇴직 전 용인소방서 소방공무원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 고가혜 인턴기자
퇴직 전 용인소방서 소방공무원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아래에서 왼쪽이 이상설씨) 고가혜 인턴기자
퇴직 전 용인소방서 소방공무원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아래에서 왼쪽이 이상설씨) 고가혜 인턴기자

이씨가 ‘행복택시’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개인택시 면허를 받은 것 자체가 로또 당첨과 다를 바 없는 큰 행운이었기 때문이다. 용인시 인구가 증가하면서 지난해 퇴직 공무원을 대상으로 개인택시를 딱 한 대 배정했는데, 30년간 소방공무원으로 복무하다 퇴직한 이씨가 그 기회를 거머쥐게 된 것. 이씨는 “나 혼자 잘 살라고 택시 면허를 준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를 한다고 말한다.

봉사는 이씨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1982년부터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소방공무원으로서 사회에 복무했을 뿐 아니라, 개인 시간에도 봉사활동을 다녔다. 택시 운전을 하는 지금도 용인동부경찰서 양지파출소 방범 순찰 대원으로 활동하면서, 오후 10시부터 자정까지는 택시 영업을 하지 않고 치안 취약지역 순찰을 다닌다.

“학생, 셔틀버스 안 오면 와서 택시 타!” 오후 4시경 용인대 캠퍼스 인근을 주행하던 이씨가 버스를 기다리던 학생들에게 소리친다. 용인대생 최진경(21)씨와 문부미(20)씨는 잠깐 두리번거리다 망설임 없이 택시에 오른다. 이미 SNS를 통해 행복택시의 존재를 알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문씨는 “만약 다른 택시가 태워준다고 하면 무서워서 절대 안 타겠지만, ‘행복택시’라는 걸 알고 탑승했다”며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이들은 "조금이라도 택시비를 받으시라"고 당부하지만 이씨는 "학생이 돈이 어디 있냐"며 손사래를 친다.

엄밀히 따지면 행복택시는 ‘무료’가 아니다. 무료로 이동한 승객은 반드시 택시 안에 비치된 방명록에 저마다의 사연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종종 손님이 없을 때 차를 길가에 세우고 승객의 발자취를 찬찬히 읽는 게 이씨에겐 일상의 낙이다. 가장 최근의 방명록에는 아픈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행복택시를 타게 된 승객이 남긴 “기사님 같은 분이 있어 한국이 살기 좋은 나라라 생각한다”는 글이 적혀있다.

경기 용인시 용인대에서 명지대 자연캠퍼스로 이동 중 '행복택시'의 취지에 관해 설명하는 이씨. 고가혜 인턴기자
경기 용인시 용인대에서 명지대 자연캠퍼스로 이동 중 '행복택시'의 취지에 관해 설명하는 이씨. 고가혜 인턴기자

하루 영업을 끝내기엔 꽤 이른 시각인 오후 6시, 이씨는 택시 전면의 ‘빈 차’ 등을 끄고 운행을 종료할 채비를 한다. 이씨는 “오늘 치안 취약지역 순찰 당번이라 좀 일찍 들어가야 한다”며 “오후 10시부터가 택시 영업 대목이지만, 나는 그보다 더 값진 일을 하러 가야겠다”고 유유히 떠난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고가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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