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글로벌 Biz 리더] “23개 염색체로, 누구나 자신을 알 권리가 있다”

입력
2017.04.07 17:39
0 0

병 걸릴 위험ㆍ선호 음식ㆍ성격…

'나만의 특징' 담긴 유전정보

99달러에 누구든지 검사 제공

다문화 美사회서 '뿌리 찾기' 이용

초기엔 가정 파탄 부작용도 나와

의사 없이도 직접 발병 가능성 판단

병원ㆍ제약ㆍ보험사 등에 국한돼 있던

건강정보 알 권리 소비자에 돌려줘

미국서 가장 대담한 여성 CEO에

베트남전쟁 중 필리핀에 머물던 미 해군 빌 타이틀씨는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필리핀을 다시 찾았지만, 연인은 없었다. 그로부터 43년 뒤인 지난달, 타이틀씨는 딸을 만났다. 백발의 아버지는 자식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 중년이 된 딸은 아버지가 전사한 줄 알고 살아왔다. 은퇴 후 일흔이 될 때까지 홀로 지낸 타이틀씨에게 이제 가족이 생겼다.

타이틀씨와 딸을 이어준 건 미국 생명공학기업 ‘23앤드미(23andMe)’다. 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유전정보를 23앤드미에 보냈고, 팔을 다쳐 무료했던 아버지는 컴퓨터 앞에서 유전정보 탐색으로 시간을 보냈다. 23앤드미에게서 둘의 유전자가 닮았다는 연락을 받은 딸은 이메일과 페이스북을 통해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다.

유전정보에는 개인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취약하고, 어떤 병에 걸릴 위험이 있는지도 새겨져 있다. 그래서 유전정보를 알면 자신을 알 수 있다. 물론 유전정보는 개인의 것이다. 23앤드미는 바로 이 점에서 출발했다. 자신을 알 권리를 고객에게 돌려주자는 것, 23앤드미 공동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앤 워치츠키(44) 대표의 신념이다.

의사를 거치지 않고 소비자에게 직접 유전정보 분석 결과를 알려주는 생명공학기업 23앤드미를 창업한 앤 워치츠키 최고경영자(CEO). 미국의 개인 유전정보 검사 서비스 시장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플로스(PLoS) 저널 제공
의사를 거치지 않고 소비자에게 직접 유전정보 분석 결과를 알려주는 생명공학기업 23앤드미를 창업한 앤 워치츠키 최고경영자(CEO). 미국의 개인 유전정보 검사 서비스 시장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플로스(PLoS) 저널 제공

“정부와 소통에 서툴렀다” 인정

회사 이름 23앤드미의 숫자 23은 사람이 갖고 있는 염색체 수다. 염색체 안에는 유전자(DNA)가 실타래처럼 둘둘 감겨 있다. 이걸 쫙 펴면 지구 둘레를 약 250만번 돌릴 수 있다. 누구나 23개 염색체를 갖고 있지만, 유전자는 사람마다 다르다. 유전자를 구성하는 물질(염기)의 종류와 배열에 따라 개인의 성격이나 건강 등이 천차만별이 된다. 그래서 23개 염색체는 곧 ‘나’다.

23앤드미는 염색체와 유전자 분석을 통해 고객들이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돕는다. 23앤드미 홈페이지에 접속한 고객이 서비스를 신청하면 집으로 키트가 배달된다. 고객은 키트 속 플라스틱 용기에 자신의 침을 모아 넣은 다음 23앤드미로 되돌려 보낸다. 이후 6~8주 뒤면 침 속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를 받아들 수 있다. 비용은 99~125달러다.

분석 결과에는 고수의 향을 질색하는지 즐기는지 같은 음식 선호도부터 외모, 성향뿐 아니라 특정 병에 걸릴 위험이 얼마나 되는지 같은 민감한 건강 상태까지 수십 가지 정보가 담긴다. 의사의 ‘검증’을 거쳐 이런 정보를 제공하는 기업은 일부 있었지만, 소비자에게 직접 결과를 알려주는 서비스는 처음이다. 고객은 자신에게 어떤 인종의 피가 얼마나 섞여 있는지, 진짜 조상이 누군지도 알게 된다. 여러 인종이 혼재된 다문화 사회인 미국에서 ‘뿌리 찾기’는 큰 관심사가 될 수 있다. 타이틀씨처럼 23앤드미 덕에 가족을 찾은 이도 있고, 23앤드미 때문에 멀쩡했던 가정이 깨지기도 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23앤드미의 키트를 2008년 ‘올해의 발명품’으로 선정했다. 화제를 모으며 승승장구하던 23앤드미는 2013년 위기를 맞았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키트 판매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분석 결과를 의학적으로 검증받지 않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불필요한 우려나 고가의 치료에 내몰릴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 동안 고객들의 호응에 가려 있던 비판도 고개를 들었다. 미국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자만심 유전자가 존재한다면, 23앤드미 직원들은 분명 갖고 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변호사들은 23앤드미가 사적인 생활의 영역을 교묘하게 침범한다고 공격했다.

이쯤 되면 대부분의 회사는 존폐의 위기를 느낄 만큼 크게 흔들리기 마련이다. 정부 규제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바이오 중소기업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하지만 워치츠키 대표는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그는 여러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새로운 시도를 할 땐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며 규제 당국과의 소통에 서툴렀다는 점을 인정했다. “FDA가 우리에게 길을 찾아주기 위해 진심 어린 노력을 했다고 믿는다”면서 “그들의 기준과 우리 데이터가 일치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쿨’한 분석을 내놨다.

워치츠키 대표는 10년 앞을 내다보고 한 걸음씩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먼저 고객에게 알려주는 정보에서 질병 가능성과 약물 반응처럼 의학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있는 부분은 제외했다. 그리곤 발병에 유전자의 영향이 명확히 밝혀진 특정 유전병(블룸증후군)에 대해서만 FDA에 키트 서비스 허가를 신청했다. 2015년 드디어 FDA 승인이 떨어졌다. 판매 금지 명령이 나온 지 14개월만이었다. 의사 없이 유전자 검사만으로 소비자가 직접 질병 발병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길이 처음 열린 것이다. 유전자 검사 시장이 블룸증후군 이외의 병으로 확대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FDA의 파격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워치츠키에게는 ‘미국에서 가장 대담한 여성 CEO’란 문구가 따라붙었다.

사람이 갖고 있는 23개 염색체를 도식화한 그림. 각 염색체마다 개인의 특성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유전자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23앤드미 제공
사람이 갖고 있는 23개 염색체를 도식화한 그림. 각 염색체마다 개인의 특성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유전자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23앤드미 제공
23앤드미의 유전정보 분석 키트. 소비자가 키트에 들어 있는 플라스틱 용기에 침을 넣어 우편으로 보내면 약 2개월 뒤 분석 결과가 배달된다. 23앤드미 제공
23앤드미의 유전정보 분석 키트. 소비자가 키트에 들어 있는 플라스틱 용기에 침을 넣어 우편으로 보내면 약 2개월 뒤 분석 결과가 배달된다. 23앤드미 제공

병원과 월가를 불신하다

‘유전정보에 대해 알 권리가 병원이 아닌 소비자에게 있다’는 워치츠키의 철학은 가정에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18개월 된 아들이 아스피린 과다 복용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걸 지켜봐야 했던 워치츠키의 어머니는 의료 시스템을 불신했다. 스탠퍼드대 물리학 교수인 아버지 역시 통계적으로 너무 적은 임상시험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의료 시스템에 회의적이었다. 젊은 시절 워치츠키가 자동차를 빌려 호스피스 병원에 있던 할머니를 무작정 태우고 8시간 동안 운전해 집으로 모셔온 것도 부모의 영향이 컸다. 할머니는 가족과 함께 2년을 더 살았다.

1996년 예일대 생물학과를 졸업한 워치츠키는 월가에 합류했다. 4년 간 투자회사 3곳에서 헬스케어 컨설턴트로 일하는 동안 그는 불행했다고 회고했다. 대학 시절 학교신문 편집장과 아이스하키 대표선수로도 활동하며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했던 그에게 돈이 전부인 월가의 문화는 말 그대로 환멸이었다. 휴가를 내고 시베리아와 몽골, 티베트, 네팔을 여행하고 돌아와 다른 길을 모색하기 위해 의대에 지원했다.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 응급실에 자원한 워치츠키는 1주일에 40시간씩 일해 생계를 유지하며 유전학을 연구했다. 소비자가 직접 유전체 정보를 접할 수 있다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을 즈음, 유전자 분석용 칩 회사 어피메트릭스에서 일하던 린다 아베이를 만났다. 2006년 4월 그들은 함께 23앤드미를 창업했다.

구글 공동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을 만난 것도 그 즈음이었다. 2007년 결혼한 워지츠키와 브린에게는 ‘실리콘밸리 부부’라는 별칭이 따라다녔고, 23앤드미는 급성장했다. 구글과 구글벤처스, 브린 등은 23앤드미에 총 10억달러의 거액을 투자하며 든든한 후원자를 자임했다. 혁신의 아이콘이 된 부부는 위키미디어 재단, 아쇼카 재단, 마이클 제이 폭스 재단, 브레이크스루 프라이즈 재단 등에 미국에서 5번째로 많은 돈을 기부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 부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6년 만에 별거에 들어간 부부는 2015년 끝내 갈라섰다. 23앤드미가 FDA의 승인을 얻어낸 4개월 뒤였다.

앤 워치츠키 23앤드미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 6월 미국 스탠포드대에서 열린 ‘세계 기업가 서밋’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앤 워치츠키 23앤드미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 6월 미국 스탠포드대에서 열린 ‘세계 기업가 서밋’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시장 판 키운 과감한 워킹맘

이혼의 아픔을 딛고 워치츠키는 ‘멀티 태스킹’ 사업가로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억만장자라고 부른다. 키즈카페와 실내 놀이터, 비디오 게임방의 주인이면서 공예품 상점도 운영하고, 부동산 투자에도 손을 뻗었다. 그러면서도 워지츠키는 한 인터뷰에서 “일주일에 하루는 꼭 두 아이의 학교를 찾아가거나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영락 없는 ‘워킹맘’이다.

그 다양한 사업 중 워치츠키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부분은 여전히 23앤드미다. 연초부터 워치츠키는 23앤드미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야심차게 선보였다. 먼저 유전자 분석 결과에 ‘가계 연대표’를 추가했다. 특정 조상이 자신의 가계도로 어느 시점에 들어왔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잃어버린 가족이나 자신의 뿌리를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다. 지난달엔 개인의 유전정보와 생활양식 차이가 몸무게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를 인공지능(AI)을 이용해 분석하는 기법을 개발했다. 이를 발전시키면 평생 자신이 도대체 몇 ㎏까지 살이 찔지 계산도 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이런 서비스가 가능한 건 23앤드미가 확보한 유전정보 데이터 규모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23앤드미의 서비스를 이용한 고객은 지난해 이미 100만명을 넘어섰다. 이들 고객 10명 중 8명이 자신의 유전정보를 연구에 이용해도 된다고 동의했다. 이게 바로 23앤드미의 힘이다. 화이자와 존슨앤드존슨, 로슈, 퀸타일스 같은 유명 다국적 제약ㆍ바이오 기업들이 앞다퉈 23앤드미와 손잡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워치츠키의 과감한 행보는 유전정보 시장의 판을 키워놓았다. 후발주자로 개인 유전정보 서비스를 표방하는 기업들은 점점 늘 전망이다. 23앤드미 입장에선 경쟁자가 많아지는 것일 테지만, 워치츠키는 이런 환경이 현대의학의 ‘엘리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기반이라고 본다. 자신의 건강을 자신이 아닌 병원이나 제약사나 보험사의 의도에 맡길 수밖에 없는 현행 의료 시스템을 바꾸려면 유전정보의 소유권이 소비자에게 있어야 하고, 유전정보 분석에 드는 비용이 아주 싸져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나 인종이나 성별에 관계 없이 아플 때 누구나 같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워치츠키가 바라는 미래 의료 시스템이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