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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억 모교 기부자에 244억 세금폭탄 없던 일로

입력
2017.04.2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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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주식 90% 쾌척했다가

‘5% 넘으면 세금’ 규정에 발목

“최대주주 판단 시점은 기부 이후”

주식 기부 증여세 기준 첫 판례

7년 5개월 소송전 이겨낸 황씨

“법이 제2 저커버그 막아선 안돼”

“솔직한 얘기로 오늘 대법원에서도 졌다면 (기부를) ‘하지 말라’하려 그랬어요.”

황필상(70) 전 구원장학재단 이사장이 20일 잠시 뜸을 들이고서 말을 꺼냈다. 사실상 전 재산을 장학재단에 내놨던 2003년, 그 때로 돌아간다면 또 기부를 하겠느냐는 물음을 듣고서다. 대법원이 그의 선의를 인정한 뒤였다. 그가 2003년 재단에 기부한 180억원대 주식에 거액의 증여세를 부과한 세무당국 처분은 정당하다는 2심 법원 판단을 깨고 대법원이 사건을 다시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그의 말에는 무려 7년 5개월간 소송전을 치르며 겪었던 고달픔이 담긴 듯했다.

황씨는 자신이 1991년 창업한 생활정보신문인 수원교차로 주식 90%(현금 15억원 별도)를 모교 아주대에 쾌척했다가 140억원의 세금폭탄을 맞았다. 장학재단 등에 5% 넘는 주식지분이 들어가면 증여세를 물리는 세법 규정을 과세당국이 2008년 9월 들이댔다. 오너 일가의 편법 증여로 회사 장악력을 높이는 걸 막겠다는 취지로 마련된 입법이 엉뚱하게 황씨에게 족쇄가 됐다. 긴 재판 동안 244억여원(가산세 포함)까지 불어났다. 그는 과거 자신처럼 가난한 학생들이 원 없이 공부하라고 모교에 거의 전 재산을 털어냈는데 거액의 증여세 부과는 부당하다며 2009년 말 소송을 냈다. 이 과정에 아파트 압류에다 20억원 강제집행까지 당하고 ‘고액 체납자’ 리스트에도 올랐다.

대법원은 황씨 또는 황씨와 재단이 기부된 주식을 발행한 회사(수원교차로)의 최대주주로 평가할 수 있는지를 두 대목으로 따지고서 막대한 증여세 부담을 안긴 것은 부당하다는 결론을 냈다. 주식 5% 초과 기부라도 최대주주가 아니면 과세는 잘못이라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최대주주인지 판단 기준 시점은 기부 뒤로 봐야 한다”고 제시했다. 주식 5% 초과시 증여세 부과 입법 취지는 출연 후 증여세 부담 없이 공익법인을 통해 회사를 지배하는 편법을 막겠다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황씨가 주식 대부분을 기부함으로써 최대주주 지위를 잃었으면 재단을 회사 지배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고 봤다. 황씨가 재단 정관 작성이나 이사진 선임 등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특수관계’인지도 따졌다. 황씨는 이런 재단 설립 초기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기부자의 선의를 배제하고서 공익법인을 악용한다고 낙인을 찍는다는 것은 합헌적 해석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이라는 판단 배경도 설명했다. 이는 주식 기부에 따른 증여세 부과와 관련해 판단 기준을 제시한 첫 판례가 됐다.

허름한 양복에 운동화를 신은 수수한 차림의 황씨는 “힘들었어도 보람이 있었다”며 무료 변론을 해준 변호인단에게도 고마움을 표했다. 황씨는 긴 다툼 동안 “(소송에) 지면 ‘대학생들이 (장학금을 못 받아) 피해를 보고, 대한민국에 앞으로 나타날 저커버그(페이스북 창업자) 같은 이들의 앞길을 이런 과세규정이 다 막는구나, 큰일이구나’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나마 이리 해결됐다. 미국처럼 다른 분들도 많이 기부하셨으면 하네요”라며 웃음 짓기도 했다.

그는 거액 기부 경위를 “미안해서”라고 했다. 빈민촌 출신인 그가 박사가 되고 카이스트 교수에 이어 회사도 세웠는데 달리 뭘 바라겠느냐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사람 수십 명이 재단을 통해 배출됐으면 한다고 했다. 재단 측은 최근까지 283억여원을 장학금과 연구비 등으로 사회에 환원했다고 밝혔다. 700명이 넘는 학생들이 그의 아낌없는 은혜를 입었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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