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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투표 불참자들에게 정치적 시민권을!

입력
2017.03.2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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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나라는 고작 12개국에 불과했으나 오늘날에는 지구상 195개국 가운데 절반 이상인 무려 117개국이 선거라는 절차를 가진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갈라파고스,2016)를 쓴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의 말처럼, “‘선거’와 ‘민주주의’라는 말은 동의어”다. 하지만 후발 국가들이 부지런히 대의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사이에, 대의 민주주의를 앞서 시행했던 선발국에서는 투표 제도의 쇠퇴를 알리는 적신호가 켜진 지 오래다.

1960년대만 해도 유럽 유권자 85%가 투표에 참가했으나 1990년대 들어 79% 밑으로 투표율이 떨어졌고, 현재는 77%로 더욱 더 떨어졌다. 유럽의 투표율은 머지않아 75% 수준을 겨우 유지하게 될 듯한데, 이는 유권자의 4분의 1이 투표소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은 더욱 비관적이어서, 대통령 선거 투표율이 60%를 밑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제18대 대통령선거(2012년)는 75.8%, 제20대 국회의원선거(2016년)는 고작 58.0%의 투표율을 보이는 데 그쳤다.

점점 떨어져 내리는 투표율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준다. 그래서 약 30여개 나라에서는 투표를 강제하는 투표의무제를 시행한다. 어떤 나라는 투표 불참자에게 과태료를 부과하고(호주ㆍ아르헨티나), 일정 기간 동안 여권 발급을 박탈하거나(그리스), 은행 거래를 제한하기도(볼리비아ㆍ멕시코) 한다. 강제가 가장 엄격한 벨기에는 첫 불참 때는 50유로(약 6만6000원), 두 번째부터는 최고 125유로(약 16만4200원)까지 누진된 벌금을 내야하고, 15년 동안 네 번 투표하지 않으면 공무원이 될 수 없다. 한국에서는 최근 유시민 전 국회의원이 투표지에 고유 번호를 매긴 다음, 투표 당일 추첨을 하여 상금을 주는 ‘투표지 로또’ 아이디어까지 냈다.

투표율을 올려보려는 이런 상벌 정책이 가진 근본적인 모순은 유권자가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를 정치권에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투표장에 나오지 않는 유권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유권자가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불러내지 못한 정치권의 책임이 더 큰데도 말이다.

전세계 민주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표율 하락의 해결책은 투표 거부자나 불참자를 대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범죄자로 취급하면서, 상벌을 통해 투표율을 높이는 것에 있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의식적으로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들의 수(數) 혹은 그들의 의사를 정치에 합산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그 대(代)의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율이 당선자의 대표성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적정선(55% 정도)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1위를 차지한 후보의 당선 취소는 물론이고, 그 대에 나온 대통령 후보들의 차기 대통령 출마권을 영원히 빼앗는 것이다. 그 대의 대통령 후보가 몇 명이 되었든, 그들이 동원한 투표율의 총량이 55%가 되지 않는다면, 유권자들이 그들 전체를 불신임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 동안 한국의 여당은 자당 후보의 당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청년층의 투표율이 저조하기를 기대했고, 반대로 야당은 노년층의 투표율을 낮추려고 애써왔다. 이런 작태는 대의 민주주의에 기생하고 있는 공당(公黨)의 태도가 아니다. 낮은 투표율과 후보 불신임(영구 퇴출)을 연동한다면 공당들은 더 이상 반민주주의적인 책략을 멈추고, 유권자를 감동시킬 정책 경쟁을 벌일 것이다. 투표율이 적정선을 넘지 못해 그 대의 후보들을 모두 퇴출시킬 수 있다면, 정치권의 물갈이마저 자동적으로 성취되는 셈이다.

여태까지 정치는 투표하는 사람들만의 독차지였다. 투표 거부자들이 후보들에 대한 심판을 투표 불참으로 표시해 봤자 이들의 적극적인 정치 행위는 늘 투표하는 사람들끼리 ‘덜 나쁜 후보’를 뽑는 것으로 원천 무효가 되었다. 낮은 투표율과 연동된 전(全) 후보 영구퇴출 아이디어는 제도 정치권에 허수(虛數)로만 존재했던 투표 거부자를 실수(實數)로 정산할 수 있게 해 준다. 자기 몫과 목소리를 찾지 못했던 투표 불참자들을 범죄인 취급 말고 정치적 시민권을 주라.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제3 지대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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