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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 대통령의 저녁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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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 대통령의 저녁시간

입력
2013.04.01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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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41%로 떨어졌다. 가뜩이나 하향 추세선(趨勢線)을 돌려 세울 호재가 없는데 17초 대독사과 파문이 덮쳤다. 어제 도하 각 언론은 일제히 청와대의 어설픈 사과를 질타했다. 인사실패하고 그에 대한 대국민 사과까지 실패했다. 이렇게 되면 40% 저지선도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박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겪어보지 못한 국정동력 상실의 위기에 처해 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 이맘때 국정 지지도가 90%까지 치솟았다. 30여 년에 걸친 군사정권 종식 후 첫 문민대통령에 대한 기대도 컸지만 YS 특유의 결단력에 의한 과감한 개혁조치들에 국민들이 열광한 결과였다. 청와대 근처 안가(安家) 철거도 YS 취임 초 박수를 받은 개혁조치 가운데 하나였다. 최고권력자의 음습한 밀실정치나 향락에 이용되는 것으로 알려진 안가를 허물어 공원으로 만들었으니 국민들이 박수를 치는 것은 당연했다.

임기 초반 그렇게 잘 나가던 YS가 나라를 6ㆍ25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IMF 외환위기 사태에 빠뜨린 최악의 대통령으로 전락한 것은 본인이나 국민 모두에게 비극이었다. YS의 대추락을 초래한 요인은 여럿이지만 안가 철거도 주요 요인의 하나로 꼽힌다. 국민들의 큰 박수를 받았던 안가 철거가 YS 실패의 주 요인이라니 처음엔 무슨 소린가 싶었다. 하지만 설명을 듣고 보니 전혀 틀린 얘기가 아니다.

과거 청와대가 운영했던 안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후의 만찬이 된 ‘궁정동 사건’ 탓에 일반국민에겐 안 좋은 이미지로 알려졌다. 하지만 대통령이 저녁시간에 편하게 측근이나 지인들과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민심을 듣는 장소이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들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인사들은 청와대 집무실이나 관저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는 직언을 하기가 좀처럼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권력 속성이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청와대 저녁행사는 대부분 오후 9시 전후에 끝난다. 청와대 관저의 밤은 얼마 전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표현대로 ‘귀곡산장(鬼谷山莊)’급의 적막강산이다. YS는 청와대 저녁행사 이후나 저녁행사가 없는 날은 차남 김현철씨 가족을 관저로 불러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럽게 주요 국정현안에 대해 현철씨 의견을 듣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그에게 국정운영을 의존하게 됐고, 급기야 현철씨의 국정농단을 불러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YS가 안가를 철거하지 않고 과거 정치동지나 지인들과 만나 술도 한 잔 하면서 격의 없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민심을 듣는 장소로 활용했다면? 차남에게 국정운영을 의존하는 일이 줄었을 테고 문민정부의 말로가 그토록 참담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취임 초 바닥 없는 국정지지도 추락 사태에 직면한 박 대통령에게 안가가 필요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하는 안가는 그에게 또 하나의 트라우마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박 대통령에겐 안가의 순기능이었던 격의 없는 소통의 자리가 꼭 필요하다.

박 대통령은 취임식 날만 빼고 지금까지 거의 모든 저녁식사를 혼자 해왔다고 한다. 적막강산의 청와대 관저의 외로움, 비명에 가신 아버지 어머니를 더욱 생각나게 하는 관저의 저녁은 박 대통령에게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길을 굴하지 않고 가게 하는 자세를 한층 다잡는 시간이기 쉽다. 그런 저녁시간이 계속되면 인사실패 등 박근혜 정부 출범 전후 모든 사달의 근원인 소통부재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다.

박 대통령에겐 지금 자신의 뜻과 다른 목소리를 원천 차단하는 ‘레이저 시선’을 끄고 편하게 소통하는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불통의 상징이 되어버린 과거의‘수첩’을 내려놓고 시중의 생생한 목소리와 민심을 듣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함께 가는 넓은 길을 놔두고 혼자 외롭게 가는 길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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