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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에 맞춰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풍경이 말을 걸어 옵니다

입력
2017.04.2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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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가를 자처하는 권영성씨가 22일 서울 종로구 서촌을 거닐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씨 제공
도시산책가를 자처하는 권영성씨가 22일 서울 종로구 서촌을 거닐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씨 제공

도시산책가 권영성씨

계절마다 떠오르는 동네로 발길

골목 변천사 담아 보고 싶어

“걸을 때 가장 좋은 친구가 누군지 아세요? 바로 나예요, 나.”

자칭 도시산책가이자 골목기행가 권영성(54)씨는 “내 호흡 소리를 들으면서 맞춰 걸으면 마음에 안정이 찾아온다”며 “보이지 않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이 어느 순간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다. 거짓말처럼 풍경이 말을 걸어 온다는 게 그의 얘기다. 수차례 찾았던 덕수궁 함녕전 앞에서 어느 날 맡았던 나무 향을 잊지 못한다는 그는 그래서 일부러 홀로 걷는다.

그의 걷기는 골목에서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건강을 위해 양천구 목동 자택부터 영등포구 사무실까지 한 시간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자동차 매연을 피해 골목으로만 다니다 문득 익숙한 길이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토요일마다 한 쪽 어깨에 카메라를 멘 채 서울 곳곳의 골목을 누비고 있다. 2004년부터 거리의 풍경을 사진에 담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거리의 풍경’을 줄인 ‘거풍’이 그의 블로그 별명이다. 그렇게 쌓인 글을 엮어 ‘나는 골목에 탐닉한다’는 책도 냈다.

“어느 계절이 되면 떠오르는 동네가 있어요. 그럼 그 동네를 걷습니다.” 새로운 곳보다는 한 번 갔던 곳을 계절마다 찾는 게 그가 걷는 법이다. 한때 매달 갈 정도로 좋아했던 성북동의 경우 우연히 같은 장소의 사계를 찍은 사진이 있을 정도다. 1년에 4번은 찾다 보니 동네 사람인줄 알고 먼저 알은체를 하거나 왜 뜸했냐는 인사도 종종 받는다.

풍경이 변하는 게 마음 아파서 못 가는 곳도 생겼다. 구로구 항동이 그렇다. 권씨는 “봄에는 장미가, 가을이면 들국화가 예쁘게 피는 집이 있어 가장 좋아하던 동네였는데 보금자리주택을 짓는다고 동네가 통째로 없어졌다”며 “그런 동네는 정이 너무 붙어서 변한 풍경에 가슴이 아파 못 걷겠다”고 말했다. 고즈넉한 한옥 동네가 좁은 카페 골목으로 바뀐 익선동, 아름다웠던 골목이 아파트 공사판으로 변한 교남동도 이젠 발길을 끊었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도심 걷기에 흥미가 생겼다. 그는 “예전에는 빌딩이 싫었는데 건물 모양과 높이가 다 다른 빌딩숲을 걷다 보면 마치 행진곡을 듣는 것 같다”며 “골목기행가로 시작했는데 이젠 도시 걷기가 즐겁다”고 말했다. “걷다 보니 골목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그의 남은 목표는 10년 후 그 동안 다닌 골목에 대한 글과 사진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내가 다닌 동네를 내 아들이 다시 가서 찍어 그 변천사를 담아보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제가 느낀 골목의 감동을 이젠 다른 사람과도 나누고 싶네요.”

퇴직 후 일주일에 세 번은 걷기 모임에 참여하는 황보수자씨는 함께 걷기 예찬론자다. 황보씨 제공
퇴직 후 일주일에 세 번은 걷기 모임에 참여하는 황보수자씨는 함께 걷기 예찬론자다. 황보씨 제공

걷기 카페 동호인 황보수자씨

세상 걷기 모임서 일주일에 3번

소소한 대화, 함께 웃는 즐거움

“소리 내며 웃을 일이 어딨나요? 그런데 여기서는 처음 만나서도 웃고 떠듭니다. 공기 좋다, 꽃이 폈네, 이런 걸로도 대화가 된다니까요.”

지난 18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지하철 마포구청역 앞. 다음 카페 ‘세상 걷기’ 회원 13명이 이른바 ‘저녁 걷기’를 위해 모여들었다. 혼자보다는 함께 걷기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들이다. 이날 모임의 가장 연장자인 황보수자(75)씨는 “혼자 동네 뒷산을 걷다가 여럿이 함께 걸으니 재미가 있다”며 “아침에 일어나서 힘들다가도 나가서 친구들 만날 생각만 하면 행복해진다”고 덧붙였다.

파독 간호사였던 그는 2004년 퇴직하고 ‘토지’, ‘로마인 이야기’ 같은 장편 소설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 뒷산을 혼자 오르다 친구 소개로 2010년 말 세상걷기 카페에 발을 들였다. 그 이후 함께 걷기에 맛 들린 황보씨는 주중 2번, 주말 1번, 최소한 일주일에 3번은 꼬박 걷고 있다. 따져보니 520회가 넘는다. 세상 걷기 카페 안에는 주중걷기, 저녁걷기, 주말걷기, 여행걷기 등 다양한 걷기 모임이 자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퇴근 후 직장인들도 걸을 수 있도록 마포, 남산, 강남 등에서 저녁걷기가 진행된다. 1만1,500여명인 전체 회원 중 실제 걷기 모임에 동참하는 회원만도 700명이나 될 정도로 걷기 열기가 뜨겁다.

그 이유를 황보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생활에 활력을 얻어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특히 이 카페 특징은 철저히 ‘닉네임’으로만 소통한다는 것이다. 황보씨는 ‘황보걷자’로 통한다. 그는 “이 카페에는 잘난 사람도 있고, 겸손한 사람도 있고, 시끄러운 사람도 있고, 예절 없는 사람도 있지만 다 같은 사람이어서 모두가 좋고, 예쁘고, 재미있다”며 “몇 살인지, 학교를 어디 나왔는지, 뭐 하는 사람인지 상관없이 친구가 되고 어울릴 수 있어 즐겁다”고 설명했다.

이날도 두 시간 가까이 마포구청역부터 홍제천, 안산벚꽃동산을 거쳐 서대문구청까지 걷고난 황보씨는 “너무 잘 정비된 길보다는 흙길에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길이 걷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걷기를 처음 시작할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 걸을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죠. 일단 무조건 한번 나오세요.”

‘서울로7017’ 자원봉사자 모임 초록산책단에 소속된 남기소씨가 18일 서울로7017의 탄생 배경 등을 설명하고 있다. 남씨 뒤로 다음달 20일 개장하는 서울로7017이 내려다보인다. 홍인기 기자 hongik@hankookilbo.com
‘서울로7017’ 자원봉사자 모임 초록산책단에 소속된 남기소씨가 18일 서울로7017의 탄생 배경 등을 설명하고 있다. 남씨 뒤로 다음달 20일 개장하는 서울로7017이 내려다보인다. 홍인기 기자 hongik@hankookilbo.com

걷기 중독 제2 인생 남기소씨

서울둘레길 157㎞ 두 번 완주

서울로7017 해설사 데뷔합니다

하루 평균 10㎞, 많게는 20㎞까지 걷고 또 걷는다는 ‘걷기중독자’ 남기소(74)씨는 요즘 마음이 설렌다. 다음달 20일 서울의 새로운 보행로 ‘서울로7017’ 개장을 기다리고 있어서다.

토목 엔지니어였던 남씨는 1995년 은퇴 이후 걷기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현재 공식 직함은 종친회 총무지만 걷기와 관련한 타이틀이 3개 더 있다. 한양도성을 보존ㆍ관리하는 자원봉사자인 ‘한양도성 시민순성관’으로 한 달에 한 번 의무적으로 순찰활동을 하고, 서울둘레길 점검과 관리를 담당하는 자원봉사인 ‘서울둘레길 아카데미 요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서울로7017이 개통되면 보행로 주변 역사 유적지와 시설 등을 안내하는 해설사로도 활약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 자원봉사자 모임 초록산책단 1기로 지원해 기초ㆍ심화 교육을 각각 10주씩 받았다.

남씨는 정년퇴직 전에도 강남구 개포동에 거주하면서 건강 증진을 위해 꾸준히 인근 대모산과 구룡산에 올랐다. 하지만 2014년 11월 157㎞ 서울둘레길 개통과 함께 모니터링 및 홍보요원인 100인 원정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걷기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었다. 걷기를 통한 어울림과 배움의 매력에 빠진 남씨는 2015년 가을에도 100인 원정대에 재차 참여해 서울둘레길을 또 한 번 완주했다. 그는 “서울둘레길 8개 구간을 걷다 보면 서울의 역사와 문화 대부분을 탐방할 수 있다”며 “나보다 젊은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점도 걷기를 즐기는 이유”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3년부터 서울시가 펼치고 있는 보행친화적 행정에 호감을 갖고 관련 자원봉사 활동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며 “서울로7017 개장을 계기로 ‘사람길’이 더 늘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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