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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등록 : 2017.03.05 09:38
수정 : 2017.03.05 12:04

[김영민 칼럼] 신입생을 위한 무협지

등록 : 2017.03.05 09:38
수정 : 2017.03.05 12:04

강호는 혼란에 빠졌다. 권력자가 마교(魔敎)에 빠졌다는 풍문이 돌자, 협객들이 대권이라는 천하제일검을 얻기 위해 불나방처럼 질주하고 있다.

대학의 신입 소협들은 중원의 혼돈에 동요하지 말고 수련에 정진해야 한다. 학령인구가 줄어들어 대학에도 곧 피바람이 불 것인 바, 자격증 초식, 봉사활동 초식, 교환학생 초식 정도로는 이 험한 강호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이에 전래의 무공비급 “용비필패”(庸鄙必敗)의 내용을 전한다.

대학 무림에는 경계해야할 다섯 사술(邪術)이 있으니, 꿀강의, 연환계(連環計), 사이다, 국뽕, 암기구토(暗記嘔吐)가 바로 그것이라. 내용 없이 학점만 잘 주는 꿀강의에 탐닉하다 보면, 근골이 약해지고 정신의 당뇨병에 걸리게 된다. 온갖 학연 지연으로 엮는 연환계만 믿고, 개인의 내공연마에 소홀하면, 결국 인간지네의 형벌을 받게 된다. 사이다발언은 듣는 순간에만 시원할 뿐 논리가 부족한 경우가 많으니, 사이다만 들이키다 보면 논리 내공은 날로 추락하게 된다. 추락한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한갓 국뽕에 취하면, 뇌혈맥이 뒤틀려 다시는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없게 된다. 구토암기란 강의내용을 달달 외워 답안지에 토한 뒤 곧 잊어먹는 것이니. 자신의 내공을 조금이라도 단련하고 싶으면 단연코 피해야 할 수련방식이다. 단련을 위해서는, 기말 페이퍼 철사장(鐵砂掌) 첨삭 지도를 손수 해주는 교수를 찾아야 한다. 자기 시간을 할애하여 소협들을 단련시키는 그들만이 강호의 진정한 존자(尊者)이다.

대학 무림에는 경계해야 할 다섯 존자가 있으니 보직자, 적혈단(赤血團), 정년보장교수, 무념존자(無念尊者), 사파(邪派)가 바로 그들이라.

첫째, 고위보직자. 대학의 재정이 날로 위태로워져 감에 따라, 이들은 눈을 마주치면 도저히 기부금을 꺼내 놓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는 중원의 황금충 역할을 맡게 되었다. 등록금에도 허덕이는 신입 소협이면서 고액의 기부금을 냈다가는, 거지들의 무림방파인 개방파로 쫓겨 갈 수 있다.

둘째, 대학최강의 살수집단 적혈단. 이들은 어떤 다혈질 젊은이라도 맥을 못 추게 하는 빨대신공을 통해 젊은 노동력을 착취한다. 빨대술에 능한 존자들은 기척도 없이 뒤를 선점하므로, 돌아보면 이미 자신의 목덜미에 꽂혀 있는 핏빛 빨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배움과 정당한 보상이 따르지 않는 노역이 부과될 때는, 삼십육계가 최선이다.

셋째, 정년보장교수. 일개문파를 이룰 만큼 무공성취를 했기에 정년을 보장받았다는데, 진짜 그런지는 확실치 않다. 이들은 불사지체(不死之體)여서, 무림맹주 대학총장조차도 이들을 65세 이전에 직업적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 그 불사지체의 광기를 다스릴 내공이 없는 교수들은, 정계, 관계, 재계를 기웃거리며 허명을 좇는 마인(魔人)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간혹 내공을 갖춘 자가 불사지체를 얻어 개성 있는 학적 성취를 이루고, 영재들과 사귀는 것을 삶의 즐거움으로 삼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넷째, 불사지체 중에는 무념존자라고 불릴 만큼 세상일에 초탈해져 경신술의 최고경지인 허공답보(虛空踏步)만 일삼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인격은 대체로 온후한 편이나, 배움을 청하면 그저 “기운을 내게”라고 한마디 건넬 뿐이니, 내공강기를 키우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섯째, 제도권 정파(正派)의 부패를 참지 못하고, 그만 흑화(黑化)하여 사파가 되어버린 이들이 있다. 이들은 정파의 초식을 무시하고, 무공의 기준을 대중의 갈채에 두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파가 부패했다는 사실이 곧 사파의 실력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대학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퇴학을 꿈꾸는 경우도 있는데, 학위과정이라는 천라지망(天羅地網)에 갇힌 이상 섣불리 퇴학하지 말고, 운기조식(運氣調息)의 기회를 갖는 것이 좋다. 이 아수라에서는 어차피 어떤 성취의 희열도 짧기 마련이니, 지나친 허무감을 경계하라. 허무는 대개 금강불괴(金剛不壞)가 되지 못한 허약한 체력에서 유래하나니, 왜 사는지 잘 모르겠거든 “슬램덩크”의 정대만처럼 애절한 목소리로 교수에게 말하라. 선생님, 고기가 먹고 싶어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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