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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그’가 아니라 그의 ‘칼럼’을 사랑했다

입력
2017.05.13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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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지미 브레슬린

지미 브레슬린은 1950년대 스포츠기자로 시작해 근 60년 간 미국 뉴욕의 여러 신문에 칼럼을 쓴 저널리스트였다. 그는 말년까지 현장을 취재하며 글을 썼고, 그의 현장은 다른 기자들이 좀체 눈길을 돌리지 않던 '패자(loser)의 라커룸'이었다. 그는 일 잘하는 기자를 넘어 자기 일의 의미를 알고 뭘 해야 할지 앞서 생각하는 기자였다. 그는 불완전한 인간이었고 실수도 많았지만, 뉴욕의 시민들은 그가 아니라 그의 칼럼들을 사랑했다. AP 연합
지미 브레슬린은 1950년대 스포츠기자로 시작해 근 60년 간 미국 뉴욕의 여러 신문에 칼럼을 쓴 저널리스트였다. 그는 말년까지 현장을 취재하며 글을 썼고, 그의 현장은 다른 기자들이 좀체 눈길을 돌리지 않던 '패자(loser)의 라커룸'이었다. 그는 일 잘하는 기자를 넘어 자기 일의 의미를 알고 뭘 해야 할지 앞서 생각하는 기자였다. 그는 불완전한 인간이었고 실수도 많았지만, 뉴욕의 시민들은 그가 아니라 그의 칼럼들을 사랑했다. AP 연합

1965년 3월 미국 앨라배마 주 셀마-몽고메리 흑인 인권행진을 취재한 뉴욕헤럴드트리뷴의 33세 칼럼니스트 지미 브레슬린은 행진과 충돌 현장이 80번고속도로와 에그먼드피터스 다리가 아니라 외진 흑인 마을의 한 학교를 찾아갔다. 그날 저항운동의 한 원인이었던 흑인 분리교육의 현장. 화장실도 없고, 창문은 죄다 깨져 방치된 지 오래된 그 낡은 벽돌 교사(校舍)의 풍경으로 그는 행진 기사를 시작했다. “바로 어제 들판에서 불어온 바람이 양철 지붕마저 일부를 잡아채 가버렸다. 겨울이 오면 바람이 더 거세질 테고, 나머지 지붕도 아마 무사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한 데나 다름없는 이 곳에서 수업을 받게 될 것이다.”( W.P, 2017.3.19)

그는 다음 날 신문을 읽게 될 독자들이 시위의 구경꾼이 아니라 그 행진의 참여자가 되기를 바랐다. 그에겐 목숨을 건 행진 못지않게 그렇게 나서야만 했던 그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그의 기사는 고만고만한 현장 기사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

브레슬린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나 몇 명이 죽고 또 다쳐서 어떻게 됐는데 그 일은 어찌 어찌해서 일어났다는 식의 고전적 저널리즘의 원칙과 룰을 답답해하고 따분해하던, 이른바 1960년대 뉴저널리즘 계열의 기자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뉴스에 적극적으로 개입, 각자의 관점과 판단을 다양한 서사기법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이들이었다. 당시는 저항적 하위문화의 전성기였고, 케네디 암살과 존슨-닉슨 정부의 실패와 부패,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시대였다. 뉴저널리즘은 불편부당을 위선이라 여기고 공식 담론을 미심쩍어하던 젊은 기자들의 저널리즘적 대안운동이기도 했다.

브레슬린은 두 해 전인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의 장례식 기사로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그는 그 기사를, 무슨 소설의 도입부처럼, 워싱턴DC 알링턴국립묘지 굴착기 인부 클립턴 폴라드(Clifton Pollard)의 아침 식사 장면으로 시작했다. 베이컨과 계란으로 식사를 하던 그는 ‘쉬는 날이지만 출근을 좀 해달라’는 상사의 전화를 받고 자신이 케네디의 무덤을 파게 될 것임을 직감했고, 미안해 하는 상사에게 “나로선 영광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차 대전에 이등병으로 참전해 미얀마 전선에서 복무했던 그는 시간당 3.01달러를 받는 42세의 중장비 10급 기사다. 브레슬린은 폴라드가 동료들과 함께 나누는 잡담들, 예컨대 케네디 무덤의 토질과 잔디의 질에 대한 ‘전문적인’ 대화까지 시시콜콜 기록한 뒤에야 재클린 케네디의 근황과 전세계 VIP들이 운집한 장례식장 현장 스케치를 간략하게 덧댔다. 그 행사장에는, 기사의 주인공인 폴라드의 자리는 물론 없다. 그는 언덕 너머 다른 자리에서 다른 무덤을 파는 중이었다. “참석자가 너무 많아 못 들어간다고 한 병사가 말하더군요.(…) 나중에 잠깐 들러 어떤지 살펴볼 거예요.(…) 뭐, 나로선 영광이죠.”(Newsday.com)

케네디의 슬로건이던 ‘뉴프런티어’ 정책의 상대적 소외계층이라 해야 할 저임금 묘지 인부의 “My Honor”는 연단에 선 어느 정치인의 슬픔의 추도사보다 뭉클했다. NBC 뉴스 책임프로듀서 리처드 에스포지토(Richard Esposito)는 “그는 칼럼 하나로 저널리즘의 미래를 바꿔놓았고,(…) 지금 디지털 저널리즘의 시대에도 언론학 커리큘럼의 값진 초석으로 자리잡고 있다”(nbcnews.com, 2013.11.22)고 평했다. 뉴욕타임스는 “(그의 무덤 인부 기사는) 그 현장을 취재했던 다른 기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무덤을 파줄 사람을 찾게 만들었다”고 썼다. (NYT, 2017.3.19)

기자의 역량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흔히 취재력과 문장력, 뉴스감각을 꼽지만, 좋은 기술자를 넘어서는 훌륭한 기자들에겐 하나의 미덕이 더 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쓰(려)는 기사가 어떤 의미인지 거듭 생각하는 능력이다. 그들은 앞만 보고 달리지 않고 자주 두리번대고 뒤돌아본다. 하나를 보고 열을 말하기보다 그 하나조차 미심쩍어한다. 그들의 기사에는, 칼럼에서조차 확신의 어조가 드물고, 있더라도 오래 만지작거린 흔적, 희미한 주저흔(躊躇痕)들이 있다. 브레슬린의 칼럼이 주는 울림이 거기서 비롯되고 했다. 브레슬린은 훗날 헌트칼리지 언론학부 초청강의에서 “이 업계에서 내가 먹고 사는 데 도움 받은 딱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사람들이 몰려있는 덴 가지 말라’는 거였다. 거기엔 틀림없이 기자들도 몰려들기 마련이다”라 말했다.(newyorker.com) 그건 물론 일종의 요령이었다. 하지만 묘지 인부의 인터뷰를 착안하는 건 자신의 일을 깊이 생각하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초년 스포츠기자 시절부터 그는 전설적 스포츠기자 데이먼 러니언( Damon Runyon, 1880~1946)의 충고, 즉 “특종을 하려거든 패자(loser)의 라커룸으로 가라”는 말의 의미(요령이 아니라)를 잊지 않았다. 평범한 이들과 약자들을 대변한 “(뉴)저널리즘의 전설” 지미 브레슬린이 3월 19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제임스(지미) 얼 브레슬린(James “Jimmy” Earl Breslin)은 1928년 10월 17일 뉴욕 퀸스의 자메이카에서 태어났다. 술집 같은 데서 피아노를 치던 아버지는 그가 6살 무렵 집을 나갔고, 지미와 여동생은 사회복지사 어머니의 노동으로 대공황기를 넘겼다. 어머니도 알코올중독자였다. 어머니가 어느 날 피스톨을 머리에 갖다 대는 걸 보고 그가 빼앗은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고교 시절 풋볼팀 선수였지만, 정말 원한 건 교내 신문팀에 드는 거였다. “하지만 거긴 똑똑한 아이들만 들어가는 데”였다.(WP, 위 기사) 대신 17세의 그가 택한 게 지역 신문인 ‘롱아일랜드프래스’의 사환(copyboy) 아르바이트였다.(biography.com) 48년 롱아일랜드대에 진학했다가 2년 만에 중퇴한 뒤 50년 ‘뉴욕저널-아메리카’를 시작으로 여러 다양한 타블로이드 매체 스포츠 담당 기자로 일했다. 프로야구팀 ‘뉴욕 메츠(Mets)’가 창단 첫해인 62년 기록한 160전 120패의 연패 행진이 그에겐 기회였다. 그는 그 해 말 뉴욕 메츠의 굴욕을 유쾌한 애정을 담아 단행본 ‘여기 야구할 줄 아는 사람 없어요? Can’t Anybody Here Play This Game?’를 썼고, 그 책이 큰 인기를 끌면서 이듬해 뉴욕헤럴드트리뷴에 스카우트됐다. 트리뷴 발행인의 동생이 뉴욕매츠 팀 최대주주였다는 말이 있다. 어쨌건 트리뷴에서 그는 스포츠기자가 아닌 칼럼니스트가 됐고, 그 해 말 케네디의 장례식 기사로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기자 중 한 명이 됐다.

그로부터 50년 동안, 그는 “64년 할렘 폭동서부터 2001년 9ㆍ11테러까지” 주요 뉴스 현장을, ‘패자의 라커룸’까지 찾아 다니며, 칼럼을 썼다. 61세이던 91년 브루클린 크라운하이츠 흑인들의 반유대인 폭동 땐 혼자 택시를 타고 현장 취재를 갔다가 구타 당하고 옷까지 벗겨진 채 속옷차림으로 쫓겨난 적도 있었다.(nypost.com, 2017.3.19) NBC 에스포지토가 지미를 처음 만난 건 1977년이었다. 당시 지미는 뉴욕데일리 칼럼니스트였고, 에스포지토는 사환이었다. 마감에 늦었다며 그의 원고를 당장 빼앗아 오라는 편집장의 지시를 받고 에스포지토가 지미를 찾아갔더니, 지미가 원고를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시키고는 거듭 기사를 고치더라는 이야기, 다 고친 뒤에야 “F--k, 올리버(편집장 이름)”라면서 원고와 함께 1달러 지폐를 자기 주머니에 넣어주더라는 이야기.(nbcnews.com)

브레슬린은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뉴저널리즘 계열의 기자였지만, 자신의 취재원이던 소수자 약자의 설움과 분노 안에 자신의 그것이 녹아 들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그것은 뉴지널리즘의 약점으로 꼽히는 '사실'의 훼손에 대한 자계였을 것이다. 1986년 퓰리처상 수상소감을 밝히는 지미 브레슬린. AP 뉴시스
브레슬린은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뉴저널리즘 계열의 기자였지만, 자신의 취재원이던 소수자 약자의 설움과 분노 안에 자신의 그것이 녹아 들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그것은 뉴지널리즘의 약점으로 꼽히는 '사실'의 훼손에 대한 자계였을 것이다. 1986년 퓰리처상 수상소감을 밝히는 지미 브레슬린. AP 뉴시스

86년 퓰리처상 논평부문 수상작인 1985년 11월 7일자 뉴욕데일리의 ‘말 못한 사연들 I lived without words’도 그렇게 쓰여진 기사였다.(Pulitzer.org) 에이즈 공포가 뉴욕을 휩쓸던 무렵, 그는 에이즈 환자였던 조지아 주 출신 농업노동자의 아들(David Camacho)을 인터뷰했다. 성 정체성을 깨닫고 뉴욕 맨해튼으로 올라와 생활하게 된 이야기에서부터 대학 시절 잠깐 사귀던 연인(여성)과의 갈등, 가족 이야기- 어려서부터 ‘사내답지 않은’ 그를 못마땅해하던 아버지는 투병중인 그에게 ‘미안하지만 아들아,(…) 나는 신이 너를 벌주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말한다-, 치료와 엄청난 치료비,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보험 이야기. 브레슬린은 기사에, 그(들)도 우리 이웃이라거나 사회가 그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쓰지 않음으로써 겁에 질려 너무나 당연한 것(인권과 정부의 역할)들을 잊고 있던 시민들을 각성시켰다. 당시 뉴욕 시장이 AIDS 확산 사태를 방치하다시피 했던 에드워드 코치(Edward Koch)였다. 통상 한 해전 기사를 대상으로 수상작(자)을 뽑는 퓰리처상위원회는 그의 저 기사를 선정하며 “(하지만) 어떤 수상자는 단지 한두 편의 기사만이 아니라 생애의 성취로 평가 받기도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1999년 11월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의 한 빌딩 공사장에서 슬래브가 붕괴되면서 멕시코 이주노동자 다수가 다치고 21살 청년 에두아르도 구티에레즈가 숨졌다. 브레슬린은 청년의 관을 따라 그의 고향인 멕시코 중부 산마티아스(San Matias)까지 갔고, 그의 짧은 생애와, 결혼을 약속한 연인과 나눈 가난한 꿈을 취재했다. 그리고 2002년 책 ‘구티에레즈의 짧고 달콤한 꿈 The Short Sweet Dream of Eduardo Gutierrez’을 썼다. 구티에레스의 꿈과비극이 27만5,000여 명에 달하던 당시 뉴욕 멕시코노동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 가장 열악한 공장에서, 건설 현장에서, 혹은 접시닦이로, 백인노동조합의 보호도 못 받으며 그들의 20% 급여로 사는 이들의 사연. 사고 며칠 전 현장 지지대에 금이 간 사실을 알렸지만 시공사가 무시한 사실도, 건설자본과 뉴욕 시당국의 결탁 의혹도 그는 책에 썼다. 당시 사업주는 벌금만 받고 풀려났다.(villagevoice.com)

브레슬린은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힘은 분노에서 나온다”(nyt)고 했다. 물론 그의 칼럼에 직설적인 분노가 담기는 예는 드물었다. 86년 그의 특종으로 뉴욕시 교통당국의 비리사건이 폭로된 지 몇 달 뒤 뇌물혐의를 받던 퀸스버러 의회 의장(Donald Manes)이 자살했다. 에드워드 코치 시장은, 자기는 알지도 못했다며 발뺌하기 바빴다. 브레슬린은 그의 변명과는 상반된 정황을 상세히 쓴 뒤 “코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해왔다”고 썼다.(WP)

1977년 뉴욕의 연쇄살인마 데이비드 버코위츠(왼쪽, 자칭 ‘샘의 아들’)가 데일리뉴스 칼럼니스트 브레슬린에게 쓴 편지. 브레슬린은 뉴욕경찰과 상의 후 저 편지를 보도해 큰 주목을 끌었지만, 상업주의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위키커먼스.
1977년 뉴욕의 연쇄살인마 데이비드 버코위츠(왼쪽, 자칭 ‘샘의 아들’)가 데일리뉴스 칼럼니스트 브레슬린에게 쓴 편지. 브레슬린은 뉴욕경찰과 상의 후 저 편지를 보도해 큰 주목을 끌었지만, 상업주의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위키커먼스.

브레슬린은 “반듯하게 사는 합법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는 잘 못 쓴다. 그들은 흠 없이 정직하게 산다고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매일 가장 심각한 죄를 저지르는 이들이다. 바로 따분함이다”라고도 말한 적이 있었다.(theguardian.com) 그를 두고 누가 뉴저널리즘을 운운하자 그는 코웃음 치며 “나는 찰스 디킨스와 요기 베라의 스타일을 반반씩 섞어 쓰는 것일 뿐”(nypost.com)이라고 했다. 프로야구팀 뉴욕양키스 포수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멋진 말을 남긴 게 요기 베라였다. 베라가 남긴 말 중에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볼 수 있다”는 것도 있었다. 69년 ‘뉴욕 시의 51번째 주 승격’ 공약을 걸고 작가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 1923~2007)와 함께 각각 뉴욕시의회 의장과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참담하게 패배한 적도 있었다. 선거 직후 그는 낙선 자체보다 “술집 문을 못 열게 하는 일에 가담한 게 수치스럽다”고 말했다. 당시 뉴욕 주는 선거 당일 술집 영업을 못 하게 했다. 못 말리는 술꾼이었던 그에겐 술집에서 만나는 시민들이 그의 취재원이자 기사의 주인공들이었다. 유년시절 익힌 뉴욕 하층민들의 ‘방언’도 그의 큰 밑천이었을 것이다.

기사의 톤과 달리 그의 성정은 급하고 거칠었다고 한다. “글을 쓸 땐, 그게 내 밥벌이여서 그런지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데, 일상에선 그게 잘 안 된다”’도 말한 적도 있었다.(WP) 그는 스스로를 ‘J.B. One and Only’라며 대놓고 뻐길 때도 있었고, ‘무식한 건달(Unlettered Bum)’이라며 자조할 때도 있었다. 늘 약자를 옹호하며 흑인 싱글맘에게 최고의 응원을 보내던 그도 그였고, 자기 기사를 비판한 동양인 여성 기자에게 입에 담지 못할 인종적ㆍ성적 모욕을 퍼부은 그도 그였다.

‘뉴스데이’ 시절이던 1990년 그는 ‘지연 메리 유(Ji-Yeon Mary Yuh)’라는 한국계 미국인 동료 기자가 그의 한 칼럼을 두고 성차별적이라고 사내메일로 비판한 데 격분, “눈 찢어진(slant-eyed” “황색 똥개(yellow cur)” 라며 폭언했다. 그 직후 사과를 했지만 며칠 뒤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악의 없는 농담을 이해하지 못해” 빚어진 일쯤으로 말해, 그는 2주 무급정직을 당했다. 뉴욕 최고의 칼럼니스트로 존경과 인기를 누리던 때였다. 그를 당장 해고해야 한다는 쪽과 해고는 과도하다며 그를 편드는 쪽이 맞섰다. 워싱턴포스트의 두 기자가 포스트 지면에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토니 콘하이저(Tony Kornheiser, 1948~)는 피해자가 태어나던 해의 셀마 몽고메리 대행진서부터 브레슬린이 치러온 고독한 인권 싸움을 나열하며 “약자를 위해 브레슬린보다 더 섬세하게, 또 과감하게 칼럼을 써온 이가 이 나라엔 없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우리 모두 편견이 있고, 지금도 각자의 편견과 싸우고 있다. 브레슬린에게 그게 좀 더 격한 싸움이었고, 한 차례 진 것일 뿐이다.”(WP, 1990.5.9) 동양계 여성으로 아시안아메리칸언론인협회 공동설립자였던 도로시 잉 러셀(Dorothy Ing Russell, 1928~2012)은 나흘 뒤 브레슬린과 토니를 함께 성토했다. 그는 자신의 유년 차별 체험을 소개한 뒤 어른들이 하던 말 – “몽둥이와 돌은 우리 뼈를 부러뜨릴 수 있지만, 말은 우리를 다치게 하지 못한다”-는 말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브레슬린이 얼마나 사악하고 야비하며 ‘속 깊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썼다. “이 취약한 다인종 사회에서 모두가 화합하기 위해 선의로 혼신을 다하고 있는 지금, 브레슬린 같은 인종주의자는 결코 도움이 안 된다. 그는 해고되어야 마땅하다.”(WP, 1990.5.13) 브레슬린은 2004년 말 은퇴했다.

그는 여러 신문사를 옮겨 다니는 사이 전업 작가가 되겠다며 쉬기도 하면서 16권(소설 7권 포함)의 책을 썼고, 또 금세 다른 신문사에 입사해 칼럼을 썼다. “기자 일이 헤로인 같다”던 그는 2011년 다시 데일리뉴스에 적을 두고 간간이 칼럼을 썼다. 리처드 에스포지토는 “그의 칼럼들 하나하나가 매주 쌓이고, 10년 또 10년 쌓여, 미국의 저널리즘이 되고, 이 도시와 뉴욕 주를, 이 나라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썼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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