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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은] 강수진 "친할머니처럼 돌봐준 선생님... 나만의 발레 눈뜨게"

입력
2017.11.18 04:4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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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코 왕립발레학교 교장

선화예술학교 시절 유학 권유

부족한 나를 인내심 갖고 지도

선생님 집에서 1년간 함께 생활

끙끙 앓을 때 수건 올려주고 약손

슈투트가르트 입단도 직접 추천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국립발레단 제공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국립발레단 제공

당시에는 ‘도대체 왜 이걸 해야 하는 걸까’ 싶었지만 뒤늦게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내게는 발레를 공부하던 학창시절 선생님의 말씀이 그랬다. 토요일 발레 수업이 끝나면 일주일이 마무리됐다는 생각에 당장 쉬고 싶었다. 그때도 선생님은 꼭 요가나 누워서 하는 명상을 시켰다. 하다 보면 피곤해서 늘 잠들곤 했는데, 짧았던 그 시간도 몇 년 간 계속되니 몸이 기억하게 됐다. 어렸을 때는 이유도 모른 채 그냥 외우기만 했던 수학 공식이 나중에야 이해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발레도 그랬다.

발레만 말하는 건 아니다. ‘발레리나 강수진’이 아닌 ‘인간 강수진’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의 교장, 마리카 베소브라소바(1918~2010) 선생님을 꼽을 수밖에 없다. 발레리나로서 성장할 수 있는 나의 가능성을 꿰뚫어 봐준 분도 마리카 선생님이다.

예술성을 이끌어 내 준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1981년 3월이었다. 내가 다니고 있던 선화예술학교에 찾아왔다. 무용 자체를 늦은 나이에 시작했고, 전공을 발레로 바꿔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도 중학생이 돼서였다. 그런 내게 선생님은 유학을 권했다.

이듬해 1년 계획을 세우고 모나코로 갔다. 당연히 실력이 부족했다. 다른 친구들이 7,8년 배운 걸 3년 벼락치기로 익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리카 선생님은 인내심을 갖고 날 지켜봐 주셨다. 4학년은 4학년 수업만 들으면 됐고, 6학년이 되면 6학년 과정만 들으면 됐다. 하지만 나는 매 학년마다 1학년 수업부터 다시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3번 할 때 6번 연습했다. 그렇게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갔다.

나중에 선생님이 들려준 말씀은 이랬다. 남들보다 더 많은 턴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남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예술적인 면을 강수진에게서 보셨다고. “스텝은 그냥 스텝이 아니다.” 선생님의 확신이었고, 어린 나를 그렇게 가르치셨다. 그렇다고 이러저러하게 해보라는 구체적 지시는 없었다. 음악을 듣고 내가 느낀 것을 표현하라 했다. 같은 작품, 같은 역할을 해도 강수진이 한다면 강수진만의 느낌이 나온다는, 아주 고마운 평은 그 때의 교육 덕택이다. 나만의 아이덴티티(정체성)는 작품에 몰입하고 해석할 때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사춘기를 겪는 나이였다. 게다가 외로운 타지 생활이었다. 선생님은 발레 말고 인간으로도 가르침을 주셨다.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하기 직전에는 1년 동안 아예 선생님 집에서 함께 살았다. 계기는 이랬다. 1985년 스위스 로잔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미국의 유명 발레단들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때 내게 “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또 다시 낯선 곳으로 가 적응해야만 하는 것이 당시 나의 성격으로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신 것 같다. 선생님과 함께 산 1년은, 사회로 나갈 준비 기간이었다.

선생님 집에서 산 제자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했다. 남들은 선생님 성격이 까다롭다 했지만 나는 그렇게 느낀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발레를 배우고 집에서는 선생님이 키우는 강아지를 돌보고 손님들에게 차 대접을 하는 식으로 소소한 일들을 돕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별 것 아닌 일상이었지만 많은 도움이 됐다. 선생님을 찾는 이들은 발레뿐 아니라 문화계 유명인사들이 많았다. 모나코 왕실 사람들도 있었다. 내성적인 나였지만 사회적으로 대단한 사람들 앞에 나서더라도 위축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주말이면 여행을 다녔다. 모나코 이곳 저곳은 물론, 주변국도 나다녔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로 나가서 그곳 발레를 감상했다. 발레뿐이랴. 미술관, 박물관도 숱하게 다녔다. 문화란, 예술이란 무엇인가 눈 뜨게 해주셨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추천해주신 분도 선생님이다. 나의 첫 공연 때도, 프랑스에서 공연을 할 때도 직접 찾아오셨다. 피가 섞인 친할머니와도 같았다. 감기에 걸렸을 때면 수건을 갖다 주고 배를 만져주셨다. 부모님이 그리운 순간마다 내 곁에는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아흔을 넘겨 돌아가셨다. 곁에서 임종을 지키진 못했다. 선생님은 기력이 쇠한 마지막까지 누워서라도 제자들을 가르치셨다고 한다.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나도 나름 고집이 있고, 한번 한다고 마음 먹으면 끝까지 하는 스타일이다. 선생님과 함께 살면서 배운 태도가 아닐까 싶다.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국립발레단 제공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국립발레단 제공

발레리나 강수진에서 국립발레단장 강수진으로

오늘날 나를 만든 이는 마리카 선생님 이외에도 50년 간 나와 함께 한 많은 이들이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만난 마르시아 하이데(80), 리드 앤더슨(68) 두 단장님은 무용수로서 나를 한 단계 더 발전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립발레단장으로서 역할을 하는 데도 도움을 주는 분들이다.

특히 앤더슨 단장님과는 ‘말괄량이 길들이기’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1997년 앤더슨 단장은 내게 주역을 맡겼다. 코믹한 모습이 나와 맞지 않는다 생각했다. 그 때 단장님은 “분명히 할 수 있다. 믿기 때문에 지금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해보고 아니면 그때 다시 얘기해보자”고 설득했다. 결국 단장님 말씀이 맞았다. 이 작품을 하면서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유머를 발견했다. 그 뒤 그 어떤 작품을 만나도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됐다.

앤더슨 단장 이전 단장이었던 하이데는 자신이 무대에서 입었던 줄리엣 의상과 반지를 내게 물려줬다. 1993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첫 주역으로 줄리엣을 맡았을 때다. 하이데가 안무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국립발레단이 무대에 올렸을 때 한국에 찾아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한국 국립발레단이 제일 좋다”는 말을 해주기도 했다.

발레는 서양의 문화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 하면 한국의 색깔이 나온다. 지난 1~5일 국립발레단이 공연한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안나 역은 세 명의 무용수가 맡았다. 세 안나가 모두 다른 안나들이었다. 내가 발레단 단장으로서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바로 그런 부분이다. 나 또한 발레단 직원들에게 배운다. 발레리나였을 때는 24시간이 전부 나의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발레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를 신경 써야 한다. 직원들의 조언 하나하나가 고맙다.

남편을 빼놓으면 섭섭할 수 있겠다. 일에 몰두하는 시간을 빼면 정서적인 보호가 필요하다. 나 혼자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 인생 또한 두 사람이 추는 춤, 파드되 아닐까. 둘이 하나의 인생을 산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의 말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리=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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