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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 칼럼] 곤충도 의식이 있을까

입력
2016.05.29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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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배추흰나비가 내가 재배하던 채소 아루굴라에 알을 낳았다. 얼마 후 아루굴라 밭에는 녹색 잎에 맞춰 보호색으로 위장한 애벌레가 넘쳐났다. 약간 떨어진 곳에 샐러드용으로 키우던 아루굴라가 있기도 했고 살충제를 사용하고 싶지 않기도 해서 애벌레들을 그냥 내버려뒀다. 애벌레들은 금세 모든 잎을 끝까지 먹어치웠다. 먹을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자 성장의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없게 된 애벌레들은 모두 굶어 죽었다.

오랫동안 머리로만 이해하던 것을 축소판으로 보게 됐다. 진화란 개별 생명체의 안녕에 개의치 않는 비인격적 자연 과정이다. 나는 종종 유신론자들이 다음의 두 가지를 어떻게 일치시키는지 궁금하다. 전지전능해서 이 모든 것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던 데다 선하고 숭배 받을 만하기까지 한 존재가 세상을 창조했다는 믿음과 자신들이 두 눈으로 보는 세계를 말이다.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고통이 아담의 원죄 때문이라고 말해왔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그 원죄를 물려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애벌레는 아담의 후손이 아니다. 데카르트는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부정했다. 하지만 개나 말에 관해서라면 심지어 그가 살던 시대에도 대부분 그러한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늘날 해부학, 생리학, 포유류나 조류 습성에 대한 과학적 탐구로 인해 그런 주장의 설득력은 더욱 떨어진다. 하지만 적어도 애벌레만은 고통을 느낄 수 없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과학자들은 곤충에게 중심 뇌가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보다는 독립된 신경절들이 곤충의 각기 다른 부분을 조절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곤충은 어떻게 의식을 갖는지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최근 미국 국립과학원회보에 실린 한 글은 이를 부정한다. 매쿼리대의 인지 과학자 앤드류 배런과 철학자 콜린 클라인은 주관적 경험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동물계에서 더 일반적 현상이며 진화의 측면에 있어서 더 오래됐다고 주장한다.

주관적 경험은 의식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어떤 생명체가 주관적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 생명체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 ‘무언가’에는 기쁘거나 고통스러운 경험이 들어가 있다. 반면 무인자동차에는 충돌 가능성이 있는 장애물을 감지하고 충돌 방지를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탐지기가 있지만 차로 존재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무언가가 전혀 없다. 사람에게서 주관적 경험은, 가령 대뇌피질의 작용이 필요한 자각처럼 더 높은 단계의 의식과 구별이 된다. 주관적 경험은 대뇌피질보다는 중뇌와 관련이 있으며 심지어 대뇌피질이 크게 손상을 입어도 계속될 수 있다.

곤충에게는 포유류의 중뇌처럼 감각정보 처리, 목표물 설정, 행동 지시에 관여하는 중심 신경절이 있다. 그것이 주관적 경험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곤충이란 범주는 굉장히 광범위하고 다양하다. 꿀벌은 약 100만개의 뉴런을 갖고 있는데 인간이 갖고 있는 200억개에 비교했을 때 많은 건 아니다. 최근 둥근머리돌고래의 신피질에서 발견된 370억개의 뉴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적다. 하지만 꽃, 물, 적합한 보금자리의 방향과 거리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8자춤’을 추고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애벌레에게는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이러한 능력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배고플 때 고통을 겪을 정도는 충분히 의식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식물은 어떨까.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동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때 종종 듣는 질문이다. 식물의 놀라운 능력은 꾸준히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식물이 주관적 경험을 한다고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관찰은 적절한 실험 조건에서 반복 가능했던 적이 아직 한번도 없었다. 배런과 클라인은 식물에겐 인지를 위한 구조가 없다고 말한다. 해파리나 회충처럼 단순한 동물도 마찬가지다. 반면 곤충과 마찬가지로 갑각류나 거미는 이러한 구조를 실제로 갖고 있다.

곤충이 주관적 경험을 한다면 세상에는 의식하는 존재들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존재하게 된다.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추정에 따르면 약 1,000경(京ㆍ조의 만배) 마리 정도의 개별 곤충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는 우리가 곤충의 주관적 경험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달려 있다. 여기서 비교 구조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진 않는다. 내 아루굴라를 실컷 먹어 치운 애벌레들은 매우 큰 기쁨을 얻었으니 잘 살다 갔을 수도 있다. 비참한 최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최소한 정반대도 똑같이 사실일 것 같다. 새끼를 많이 낳는 종은 부화하는 순간부터 일부 새끼들이 굶주릴 것이다.

서양에선 지나는 길에 개미를 발로 밟을까 봐 옆으로 쓸어내는 자이나교 승려들을 보면 웃는다. 웃는 대신 우리는 논리적 결론에 따른 연민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곤충의 권리를 위한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렇게 하기엔 곤충의 주관적 경험에 관해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 어차피 세상은 이런 운동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준비도 전혀 돼있지 않다. 일단은 고통을 느낀다는 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척추동물의 권리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부터 확대해야 할 것이다.

피터 싱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ㆍ윤리학

번역=고경석기자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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