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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우리민족 속의 호랑이 그리고 귀환

입력
2017.03.2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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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CD도 사라지는 추세지만, 예전에는 비디오테이프가 대세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모든 비디오에는 ‘불법복제 비디오의 폐해는 호환마마보다도 더 무섭다’는 홍보영상이 탑재되곤 하였다. 여기에서 호환이란 호랑이에게 해를 입는 것이며, 마마란 천연두를 가리킨다. 즉 이 두 가지는 과거 우리민족을 위협하던 대표적인 재앙으로 현대에 들어와 비디오에까지 입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마보다도 호환이 앞서 언급될 정도이니, 과거 호환은 무척이나 위협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번성한 것은 국토의 70%가 산지이며, 이것이 태백산맥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문화 속에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이야기’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과 같이, 호랑이와 연관된 부분이 다수 존재한다. 특히 속담을 보면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거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등 호랑이가 등장하는 게 무려 20여종이나 된다. 즉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말마따나, 과거 우리민족에게 호랑이는 지척에 존재하는 매우 섬뜩하고도 치명적인 위협이었던 것이다.

호환은 산에 위치한 산사에는 더욱 큰 위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속담 중에는 ‘새벽 호랑이는 승려와 개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있다. 이는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는 산사의 승려들이 호환에 더 크게 노출되어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이 때문에 한국 산사에서는 새벽예불 전에 커다란 목탁을 큰 소리로 두드리며 도량을 도는 도량석이 발달한다. 여기에는 사찰의 기상(起床)을 알린다는 목적과 함께 큰 소리를 내서 호랑이를 쫓으려는 의미도 함께 내포되어 있다.

또 산사에는 으레 산신을 모신 산신각이나 삼성각(三聖閣)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 보면, 신선의 모습을 한 산신과 더불어 해학적인 모습의 우스꽝스러운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은 까치와 호랑이를 함께 그리는 ‘작호도(鵲虎圖)’와 같은 민화들 속에서도 확인된다. 혹자는 이런 호랑이 그림이야말로 피카소가 제창한 입체파의 선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호랑이를 희화해서 그리는 과정에서 입체파의 다면적인 시점에 따른 표현이 일부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는 이유가 실은 너무 무서운 것을 희화화함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해 보려는 방어기제임을 알게 된다면, 문득 눈앞의 현상을 넘어선 서늘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밖에도 호랑이는 우리나라 사찰의 건축구조에도 일대 변화를 준다. 산사에 가보면 산문(山門)이 상당히 멀리 위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긴 진입로의 확보 역시 인적을 길게 남겨 호랑이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건축적인 방어조치에서 비롯한 것이다. 과거 마을 어귀의 거대한 당산나무 아래에는 돌무더기가 쌓여 있곤 하였다. 지금이야 이것을 도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로 주로 이해하지만, 이는 원래 호랑이와 같은 맹수를 만났을 때 투석전을 전개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진지로서 설치된 것이었다. 산사의 멀찍한 산문 역시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를 호령하던 그 많던 호랑이는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남획으로 단기간에 멸종된다. 그러나 우리의 호랑이는 88 서울올림픽을 통해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호돌이로 부활한다. 그리곤 다시금 3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백호를 모티브로 한 수호랑으로 거듭났다. 과거 호랑이에 쓸린 아픔이 이제는 세계인의 축제 속에서 우리나라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승화된 것이다. 이제 호랑이는 공포와 희화라는 두 극단을 넘어, 친근하면서도 당당한 우리민족 기상의 대변자 역할을 하고 있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호랑이 역시 우리와 함께 멋들어지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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