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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앓이하다 퇴사… 은밀하게 피 말리는 ‘직장 내 왕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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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앓이하다 퇴사… 은밀하게 피 말리는 ‘직장 내 왕따’

입력
2018.05.03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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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채 속앓이, 퇴사 몰려

일정 안 알려주고 밥 같이 안 먹고…

교묘한 따돌림에 조직은 은폐 급급

학계 연구ㆍ사실 규명 어려울 정도

#기업 79% 전담부서 없거나 미미

성희롱 피해ㆍ내부고발 후 찍혀

직장 내 외톨이 되는 경우 많아

따돌림 방지ㆍ처벌 법적 장치 없어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의 한 인터넷 웹사이트 대행사에 일했던 정가온(30ㆍ가명)씨의 2년은 감옥 생활과 같았다. 옆 팀 김형수(31ㆍ가명)씨는 신입사원이던 정씨에게 끊임없이 “잠자리 기술이 좋다. 사귀자”라며 온갖 성희롱을 일삼았다. 정씨가 김씨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한 뒤 악몽 같은 시간이 시작됐다. 김씨는 평소 자신과 친했던 정씨 팀 상사 이모씨와 함께 정씨를 압박했다. 평소 김씨가 정씨에게 관심을 드러내는 것이 못마땅했던 이씨는 회식ㆍ워크숍 일정 등을 정씨와 공유하지 않았고 다른 직원과 함께한 점심 식사와 티타임도 정씨와는 갖지 않았다. 이씨는 회사 측이 관리하던 웹사이트의 운영 업무를 정씨에게 모두 떠넘기며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전에 한 달 만에 해고된 직원처럼 만들 수도 있다”라고 압박했고 반차(반나절의 연차휴가)를 쓰는 것조차 “팀원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아라”라고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는 정씨 퇴근 후 다른 동료들과 함께 정씨의 사내 메신저 내용을 훔쳐본 뒤 “정씨가 사내연애를 하고 있다. 회사 분위기를 망치니 해고해야 한다”라며 암암리에 선동했다. 충격을 받은 정씨는 괴롭힘당한 사실을 사내 임원에게 이야기했고 김씨와 이씨는 정씨와 업무적으로 분리됐다. 하지만 따돌림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같은 팀이었던 이씨는 정씨에게 다른 부서 사람들을 만날 때면 자신에게 보고할 것을 요구했고, 수시로 모니터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며 메신저 내용을 확인하려 했다. 다른 동료들도 눈치껏 정씨가 자리를 비울 때면 이씨에게 보고하며 동참했다. 회식 자리에서도 이씨는 “실세 앞에서 말조심해야겠다”라며 조롱했다. 정씨는 “괴롭힘이 멈추지 않아 재차 임원에게 고발하고 나서야 정식 인사이동과 함께 따돌림이 잠잠해졌다”라며 “하지만 가해자들로부터 어떤 사과도 받지 못한 채 결국 내가 회사를 그만뒀다”라고 토로했다.

교묘하게 이뤄지는 ‘왕따’ 작전

은근하고 교묘하다. 피 말리는 하루가 두렵지만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는다. 피해 사실을 고백하려 해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다 큰 성인들의 직장 내 집단따돌림(일명 왕따)에 속앓이하는 이들이 상당하다. 한진 등 대기업 오너 일가의 폭언과 갑질은 이슈화돼 직장 동료와 사회의 도움을 받아 벗어날 수 있지만, 조직 내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집단따돌림은 벗어날 방책이 미미하다. 성인들의 왕따는 책을 찢어버리거나 별명을 붙여 놀리고 구타하는 등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청소년들의 그것과 차원이 다르다. 회의 시간을 알려주지 않거나 점심을 같이 먹지 않고, 작은 실수에도 크게 면박을 주고 감시하는 등 보일 듯 말 듯 한 작은 행위들로 피해자들의 가슴을 후벼 판다. 같은 공간, 시간 속에서도 고립된 세상 속으로 밀려가는 사이 피해자들의 마음은 황폐해져만 간다. 더구나 어떤 법적 장치도 제대로 직장인 왕따를 제어하지 못한다. 생계와 직결한 직장에서의 따돌림을 벗어나려면 결국 피해자가 일자리를 떠나야 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아이들과 달리 직장인 왕따는 너무 지능적이고 은근하게 이루어져 학계에서 연구하거나 사실을 규명하기도 어려울 정도”라며 “어른들은 아이처럼 선생님이나 부모님 같은 보호자에 의지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왕따 사실을 고백할 경우 자존감이 무너질 것을 알기에 혼자 앓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성인들의 왕따는 대체로 성희롱이나 내부 고발 등 직장 내 특정 사건 이후 ‘찍힌’ 이들에게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 대부분 일상에서 대인 관계가 원만하고 정상적인 연애나 결혼생활을 하는데도 유독 직장이란 집단에서만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다. 국내 유명 대기업의 건물청소관리 하청업체 관리자로 일했던 김미연(가명)씨는 낙하산 인사들이 모기업의 단가 후려치기를 용인하는 행위를 모기업에 고발한 이후 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회의 때마다 무리한 자료를 요구하며 “비리가 있는 거 아니냐”라고 트집을 잡았고 경력과 상관없는 건물 관리 사무실로 부당전보를 내기도 했다. 낙하산 인사들이 ‘김씨가 장부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회삿돈을 횡령해 집을 샀다’는 유언비어까지 퍼뜨리자 동료들도 슬슬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김씨는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한 유명 대기업 직원 장성호(35ㆍ가명)씨는 어느 날 입사 동기로부터 자신만 빠진 동기 단체 채팅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장씨는 동기 모임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동기들과 의견이 충돌하곤 했는데 이들 중 한 명이 장씨를 뺀 단체 채팅방을 만든 것이다. 이후 친목 모임에서도 일부러 장씨를 부르지 않는 행위들이 반복됐다. 장씨는 “대학 시절 동아리 회장까지 맡는 등 대인관계가 원만한 편이었는데 이해할 수 없었다”라며 “알고 보니 동기 모임을 주도하고 싶은 이가 나를 불편하게 느껴 배제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고립된 피해자들 말할 곳이 없다

피해자들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지만 대부분 기업은 직장 내 윤리규범 등으로 괴롭힘을 제한할 뿐 따로 공적 관리 기구를 두지 않는다. 한 중견기업에서 10년간 근무했던 이모씨는 경력직으로 입사한 직속 상사와 동료들로부터 무시와 폭언 등 지속적인 따돌림을 당했다. 업무상 실수를 저지른 뒤부터 상사는 이씨의 근무 태도를 문제 삼으며 부하 직원들 앞에서 공개적인 면박을 줬고, 계약직 직원들에게도 아예 호칭 없이 이름만 부르게 했다. 이씨는 “사내 고민 게시판에 올려봤자 부서에서도 뻔히 볼 것 같아 자살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사내 노사협의회도 실질적으로 운영이 안 돼 호소할 곳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2016 직장인 근무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회사에 직장 괴롭힘에 대응하기 위한 전담 부서 및 담당자가 없다는 응답은 절반(48.7%)에 달했으며, 있는지 모르겠다는 응답이 30.5%인 만큼 존재감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피해자 대부분은 가해자에게 직접 맞대응(35.9%)하거나 주변 사람에게 알리고(27.3%), 혼자 체념(20.3%)하는 등 개별적으로 감내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피해자의 퇴사로 일단락되는 등 손실되는 인건비만도 연간 4조7,835억원(제조업 등 주요 15개 산업 기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사회적 비용은 막대하다.

“우린 잘못 없다” 집단의 변명

도리어 피해자가 속한 집단은 사건 해결보다 변명에 급급하기도 한다. 지난 2월 전북 익산의 한 여고에서 24년간 일한 50대 교사 김모씨는 학교 옆 빌딩에서 몸을 던졌다. 그가 남긴 세 줄짜리 유서에는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과 함께 특정 교사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렇게 인생을 살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유가족 측은 “지난해 딸에게 녹음을 하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등 학교에 자기 편이 없다고 호소했다”라며 “최근 갑자기 떠맡게 된 과목이 평소 맡았던 부분보다 난도가 높아 밤새워 공부했지만 어려워 ‘죽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다”라고 말했다. 본보가 접촉한 이 학교 재학생들은 “학생들을 좋아하고 매우 밝은 선생님이었지만 늘 혼자 다녔다”라고 입을 모았다. 사진 동호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등 다른 대인관계가 원만하던 그였다. 김 교사의 죽음 뒤 학생들은 학교 측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였지만 학교 측은 “따돌림은 전혀 없었으며, 김 교사가 우울증을 앓고 있던 것 같다”고 주장했다.

해외에서 파견직으로 근무하던 당시 따돌림을 당했던 박모씨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아무도 안 슬퍼할 거다”라는 말을 듣고 부장과 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런 일은 어디에나 있다. 이런 걸 견디지 못하면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며 참으라는 권고뿐이었다. 곽금주 교수는 “피해자가 속한 집단은 피해자 한 명만을 이상한 사람으로 규정해 다수인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조직의 응집력을 높이려는 경향이 뚜렷하다”라며 “집단 내 해결이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법과 제도로 이들을 구제하는 것이 시급하다”라고 조언했다.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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