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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프랑스 정치실험의 문화적 의미

입력
2017.06.3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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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전대미문의 정치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만39세 정치신인 엠마뉘엘 마크롱이 최연소 대통령에 당선되더니 6월 18일 총선 결선투표에서는 신생정당 ‘전진하는 공화국(레퓌블리크 앙 마르슈)’이 과반의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정치이론으론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다.

일간지 르몽드는 총선 결과를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 여당이 577석 중 과반을 넘었고 연대세력 민주운동당까지 합치면 361석, 63%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둘째, 기권 57.4%는 역대 최고치다. 셋째, 사회당과 연대세력은 46석, 공화당과 연대세력은 126석에 그쳐 프랑스 현대사를 이끌어 온 전통적인 두 거대 정당은 대패했다. 넷째, 극우 국민전선(FN)과 급진좌파는 예상보다 선전했다. 다섯째, 중견 정치인이 대거 낙선했다. 여섯째, 여성 당선자 223명, 하원의 38%로 여성비율이 역대 최고다.

이런 결과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정치적으로는 선거혁명이라 할 만큼 대대적 물갈이임에 틀림없다. 동성애자 네 명 당선은 소수자 인권의 진보이고, 여성의원 비율이 높아진 것은 정치적 양성 평등의 성과다. 대통령의 정당 앙 마르슈는 후보의 51%를 여성으로 내세워 대부분 당선시켰다. 93년 하원의 여성 비율이 6%였던 데 비하면 여성의원 비율은 6배로 늘어났다. 앙 마르슈 후보 중 281명은 정치 신인이었지만 대거 당선됐다.

무엇보다 마크롱이 발탁한 참신한 정치인들이 눈길을 끈다. 당선자 중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 세드리크 빌라니가 단연 두드러지는데 단발머리에 나비 넥타이를 맨 독특한 스타일의 수학자다. 90년대 아프리카 르완다 집단학살의 생존자로 프랑스 가정에 입양된 27세 경제학자 에르베 베르빌도 주목할 만하다. 모로코 이민 2세인 33세 벤처기업가 무니르 마주비는 프랑스 사회당 대표를 꺾고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이민 2세, 입양아 등이 국회의원에 당선돼 당당하게 주류 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런 변화의 힘은 결국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전임 올랑드 대통령 시절 동양계 최초 장관으로 발탁돼 화제를 낳은 플뢰르 펠르랭도 입양아였다. 그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성공한 한국인 입양아가 아니라 뼛속까지 프랑스인이라며 개도국 출신 입양아가 장관이 될 수 있는 나라는 프랑스밖에 없을 거라고 말했다. 프랑스 정치변화에서 우리는 저변의 문화를 읽어야 한다.

이번 대선, 총선의 격변도 220여년 전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인권선언의 정신이 프랑스인의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문화로 뿌리 내려 왔기에 가능했다. 정치격변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의 정치의식과 가치관이다. 기득권 정당체제와 낡은 정치로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본 인식은 그냥 생각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실험과 도전의 선택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민족은 다혈질이다. 자신들의 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에서 처형했던 사람들이다.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부단히 새로운 실험을 하고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왔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류의 보편이념, 톨레랑스 정신, 공화국이라는 정치모델, 좌우가 공존하는 동거내각, 여성해방 이념 등은 모두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낡은 질서를 거부하는 진취성, 다양성을 존중하는 열린 사고, 보편적 진보와 인권에 대한 믿음 등이 오랜 기간 프랑스 정치문화의 기반을 다져왔기에 혁명적 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정치가 바뀌어도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지만 문화가 바뀌면 어떠한 정치도 가능하다. 결국 문화가 중요하다. 과학발전에는 과학문화가, 정치발전에는 정치문화가 중요하다. 문화가 바뀌어야 정치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

최연구 한국과학창의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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