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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딜레마를 넘어서

입력
2016.04.2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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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의 기관지 ‘유네스코 쿠리에’의 편집장이었던 엘 나디는 언젠가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통찰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는 신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더는 그의 조상들과 같지 않았다. 씨족집단의 구성원이었을 뿐인 조상들과 달리 그는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학습한 근대적 주체였다. 그러나 그가 배운 학문은 개인을 전근대로부터 해방시킨 동시에 식민지배자에게 굴종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뛰어넘으려면 신식 학문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거부하는 불가능한 일을 해내야 했다.

엘 나디의 딜레마는 사람의 내면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후기 식민사회가 겪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식민 본국이 식민지를 수탈했을 뿐 아니라 문명의 진보 또한 가져다 주었다는 사실로 인한 딜레마다. 결국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나라들은 크게 두 집단으로 쪼개져 불화하게 된다. 하나는 신식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 거주하는 도시요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고수하는 지방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민이 보기에 지방이란 구시대의 권력 관계를 답습하고, 원리주의 종교나 미신을 믿으며, 인권을 억압하는 가부장적인 세계다. 지방민이 보기에 도시란 이방인의 관습을 받아들이고, 자국의 문화를 무너트리며, 자신들을 착취하는 자본가들의 세계다.

이런 사회는 갈등이 생기면 곧장 서로를 적대한다. 갈등의 원인을 상대편에서 찾으면서, 우리편의 행동은 저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내전이 터지고 서로를 살육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100만에 달하는 희생을 낸 르완다 내전에서, 투치족은 약탈적인 지방 토호와 군벌에 맞선 저항이라고 생각하며 후투족을 죽였다. 후투족은 압제적인 중앙 관료에 맞선 저항이라고 생각하며 투치족을 죽였다. 그런 파국을 막기 위해 후기 식민사회는 강력한 독재적 권력을 필요로 한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중동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의 여러 나라들이 독재에 빠져들었다. 엘 나디는 사회를 통합시키는 독재적 권력자를 국부(國父)라고 했는데, 국부는 서로 다른 집단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시켰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근대의 합리성과 전통적 보수주의를 애매하게 섞으면서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그런데 다른 구 식민국들과 비교하면 한국은 다소 특이한 점이 있다. 우리는 폭군으로 변한 독재자를 쫓아냈을 뿐 아니라 더 이상 독재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을 찍는 지방을 보는 수도권의 시선, 그리고 더민주당을 찍는 수도권을 보는 지방의 시선을 관찰하건대, 도시와 지방의 차이는 여전한 것 같다. 오히려 이번 총선을 통해 그 차이는 더욱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야당 성향이라 해도 서울과 호남의 투표 결과는 크게 달랐던 것이다. 또 같은 지방이라 해도 중심지와 농어촌의 결과는 달랐다. 이를 두고 지방민들이 지역 유지에게 표를 던진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옳은 말이 아니다. 도시와 지방이 추구하는 가치가 달랐던 것뿐이다.

갈등의 씨앗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한국은 지난 시대의 잔재를 여전히 품고 있는 ‘후기-후기 식민사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강력한 권력이 요구되지 않는 까닭은 이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한때 다수를 차지했던 농업 인구는 도시 알바노동자 인구의 절반에 불과한 27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도시 권력은 계속해서 지방 인구를 빨아들이면서 자기자신을 위해 지방에 원전과 군사시설을 짓고 송전탑을 세운다. 마치 서울을 정점으로 하는 하나의 도시국가가 자국의 나머지 지역들을 식민화 해나가는 것 같다. 이에 반발하는 지방 민심을 향해 언제까지고 보수 정당만 찍고 구태정치인만 찍는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정치적 올바름이란 도시 중간계급의 윤리에 불과하다. 갈등의 원인은 상대편이 아니다. 우리도 서로를 거부하는 동시에 받아들이는 불가능한 일을 해내야 한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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