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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왜 우리는 ‘87년 헌법’을 그들의 손에 맡겼나

입력
2018.04.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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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겨울, 온 국민이 ‘국가의 근본’을 따져 묻기 시작했습니다. 광장에 쏟아진 1,700만 개의 촛불이 밝힌 것은 다름 아닌 ‘헌법’. 국민의 주권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헌법이 반대로 국민의 주권을 위협해왔다는 것을 우리는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올해로 31년째 장수하고 있는 이 ‘87년 헌법’은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요? 한국일보가 짚어봤습니다.

기획, 제작 :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87년 체제’로 불리는 현행 헌법이 올해로 서른을 넘겼다. 이에 정치권의 개헌 움직임이 바빠지고 있다. 2016년 촛불 혁명을 기점으로 국민들이 개헌 논의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지 1년 반, 1987년 제9차 헌법개정안이 선포된 지 무려 31년 만이다.

6월 항쟁의 부름으로 만들어진 87년 헌법은 평균수명 4년 10개월이라는 역대 헌법들의 짧은 수명과 대비되며 시대를 건너왔다. 그렇다면 87년 체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987년 6월,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모두가 ‘진짜 민주주의’를 지탱할 새로운 헌법을 갈망했다.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6ㆍ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받아들였을 때만 해도 그 염원이 실현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공이 정치권으로 넘어오자 순수했던 열망은 어느새 야욕으로 돌변했다.  ‘일단 대통령부터 되고 보자, 민주주의의 미래는 나중에 고민해도 늦지 않다.’ 당장 12월 대선을 코앞에 둔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는 하나같이 조급했다.

87년 체제는 그런 위태로움 속에서 얼기설기 짜이기 시작했다. 여야의 개헌 협상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해 결성된 ‘8인의 정치회담'은 사실상 '정치협상'과 다름없었다. 

여당과 야당에서 각각 4명씩 동수로 구성된 8인의 조합은 고도의 정치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겉으로는 ‘적은 인원끼리 모여 빨리 성과를 내기 위함’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상은 ‘깜깜이 졸속 진행’을 위한 밀실협상.

“협상 안건에 관해서는 세세한 걸 따지질 않더라고. 빨리빨리 끝내란 거야. 얼른 대선해야 되니까 시시한 거 가지고 다투지 말란 소리지.”(이한동 당시 민정당 의원) 100여 개의 쟁점을 두고도 불과 한 달 만에 합의안이 뚝딱 나왔다.

대통령을 하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노태우ㆍ김영삼ㆍ김대중 3인 어느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상대방이 될 경우 그다음을 자기가 노리기 위해서라도 대통령 임기는 길면 안 된다는 게 양쪽의 일치된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나온 게 5년 단임제였습니다.”  (이중재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

헌법 전문에 삽입하기로 했던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 정신’은 협상 카드로만 이용되다 허무하게 빠졌다. 노동 3권 보장, 기본권 확립 등 국민의 실질적인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세부사항도 없었다.

중요하게 다뤄졌던 의제는 오직 ‘대통령의 임기’와 ‘단임제냐 중임제냐’였기 때문. 게다가 조문을 작성하면서 참고했던 것은 놀랍게도 20년 전 박정희 정부 시절의 헌법이었다. 

오롯이 ‘대선’만을 겨냥한 헌법이 만들어지는 사이, 시민의 존재는 자취를 감췄다. “개헌을 어떻게 할지의 각론은 정치인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죠. 직선제를 쟁취했으니 일단은 됐다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태경 현 바른미래당 의원)

민주주의의 허울을 쓴 장기 독재를 경험한 시민들이 법과 제도에 대해 가지게 된 만성적인 불신 탓도 있었다.  “어차피 제도는 허울뿐이다. 일단 선거를 하자.”

직선제가 되고 나면 정권교체는 떼 논 당상이라 여겼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한 철 대충 버틸 요량으로 지어낸 ‘가건물’이 장장 ‘30년 머물 자리’가 될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직선제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 5년’은 잘못했다.” (이한동 당시 민정당 의원) “민주화를 뿌리내리려면 일단 연임을 끊어야 했다. 폭넓게 국민의 의사를 규합할 시간이 없었다는 점이 아쉽다.” (이용희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

8인의 정치회담 멤버 중 일부였던 원로 정치인들은 지난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뒤늦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장기 독재를 막기 위한 ‘단임’은 분명한 시대정신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만이 전부였던 개헌이었다.

이제 30년 만에 ‘국가의 근본’이 새로 닦인다. 대충 만든 집에 물이 새고 바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2016년 촛불 혁명을 거치며 대한민국이 마주한 시대정신은 바로 ‘민주주의의 재건’.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촛불로 비춰가며 주권자로 다시 태어난 오늘의 시민에겐 ‘헌법’을 논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작, 기획 :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사진 출처 :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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