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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르포] 목소리 없는 영국인들이 “브렉시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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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르포] 목소리 없는 영국인들이 “브렉시트”라고 말했다

입력
2016.06.2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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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앞에 모인 브렉시트 지지자들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런던=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2016-06-24(한국일보)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앞에 모인 브렉시트 지지자들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런던=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2016-06-24(한국일보)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확정된 24일(현지시간) 오전 7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의 관저가 있는 다우닝가 10번지 앞으로 탈퇴파 영국인들이 몰려들어 얼싸안고 기쁨을 나눴다. ‘EU 탈퇴에 투표하라’는 문구가 적힌 유니언 잭(영국 국기)을 망토처럼 두르고 나타난 대런 지어리(33)는 “패배자(캐머런 총리)의 얼굴을 보러 왔다. 그는 당장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투표 당일인 전날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잔류 진영과 탈퇴 진영의 긴장감은 런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런던은 온통 탈퇴 진영이 점령한 도시 같았다. 다우닝가 10번지 앞을 지나는 런던 택시마다 경적을 울려댔고 거리의 브렉시티어(Brexiteerㆍ브렉시트를 주장하는 시민들)들은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런던 택시기사들은 잔류가 우세했던 런던에서 탈퇴입장을 발표한 대표적인 집단이다. 길을 지나던 한 승합차 운전자는 “시민에게 힘을(Power to the People)”이라고 외쳐 더 큰 박수를 받았다. 지어리는 “우리는 더 이상 브뤼셀의 복잡한 법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주권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과도 더 좋은 새 협정을 맺을 수 있게 됐다”며 브렉시트의 효과까지 거침없이 설파했다.

투표 당일 런던 지하철역 입구 근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나는 유럽 안에 잔류한다(I’m in)’라고 적힌 푸른색 셔츠 군단은 거짓말처럼 거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국회의사당 시계탑 ‘빅 벤’ 건너편에서 17년째 신문 판매점을 운영하고 있는 앤디 디미트리우(69)는 “잔류를 주장한 이들은 목소리를 내지 않은 다수의 생각에 무관심했던 것”이라며 혀를 찼다. 그는 “영국이 다시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내려면 유럽에 투자하는 막대한 금액을 국내로 돌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잔류 진영은 패잔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런던정치경제대학(LSE)에서 개표 결과를 지켜보던 대학생들은 BBC와 스카이TV가 투표당일 여론조사 결과를 잔류로 보도하자 즐겁게 술잔을 나누다 이튿날 오전 2시부터 탈퇴 진영의 승전보가 쏟아지자 짐을 챙겨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한 학생은 “믿을 수 없다. 영국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중심부 런던의 고학력ㆍ고소득층이 드러내놓고 잔류를 지지하는 동안 같은 공간에 머물던 상점 점원, 화물차ㆍ택시 운전사들은 내심 탈퇴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런던은 75%가 잔류에 투표한 잔류 강세지역이다. 런던처럼 젊고 학력이 높은 도시 거주자들은 잔류를, 늙고 학력이 낮은 지방 거주자들은 탈퇴를 지지할 것으로 예측됐다. LSE 정치학 교수진도 청년층의 투표율 상승에 주목해 잔류 우위를 전망했다. 그러나 상식은 계급투표로 깨지고 말았다. 잉글랜드 중부 노팅엄은 25세 이하 투표인구가 전체의 3분의 1에 이르는 영국 전역에서 가장 젊은 지역으로 꼽혔음에도 투표율은 62%로 저조했고 그나마 투표결과도 탈퇴 진영의 신승으로 판명났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선거구 연령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고소득층도 거의 없는 노팅엄에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자연스럽다”고 지적했다.

한편 해외 관광객들은 런던의 핵심 관광지 중 하나인 트라팔가광장 옆에 늘어선 환전소를 방문해 파운드화를 달러화 등으로 황급히 교체해 가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에서 온 바버라 미첼은 “설마 탈퇴로 결론날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며 “남은 여행은 오로지 신용카드로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24일 런던 빅벤 앞에서 만난 앤디 디미트리우(69)는 "EU 탈퇴로 인해 입는 경제적 손해는 일반 국민과 관계가 없다"며 "EU로 나가던 돈을 국내로 돌릴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런던=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2016-06-24(한국일보)
24일 런던 빅벤 앞에서 만난 앤디 디미트리우(69)는 "EU 탈퇴로 인해 입는 경제적 손해는 일반 국민과 관계가 없다"며 "EU로 나가던 돈을 국내로 돌릴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런던=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2016-06-24(한국일보)
23일(현지시간) 런던정치경제대학(LSE) 유럽연구소가 주최한 "국민투표의 밤 2016" 행사에서 전문가와 학생, 취재진들이 초조한 눈길로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런던=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2016-06-24(한국일보)
23일(현지시간) 런던정치경제대학(LSE) 유럽연구소가 주최한 "국민투표의 밤 2016" 행사에서 전문가와 학생, 취재진들이 초조한 눈길로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런던=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2016-06-24(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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