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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강제’와 ‘소녀’의 함정을 넘어서

입력
2016.01.20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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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는 쏙 빠진 채 양국 정부가 날치기로 진행한 한ㆍ일 ‘위안부’ 합의 이후 한 달이 흘렀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지난 18일 공식 석상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연행을 부인했다.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문에 등장하는 ‘군의 관여’는 말 그대로 군이 ‘위안부’ 운영에 관여했을 뿐, 동원에 강제성은 없었다는 취지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강제성을 부인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지만, 한편으로는 교묘한 물타기이다.

총동원 체제의 피식민지인에게 강제와 자발이라는 구분은 무의미하다. 설령 ‘동원에 강제성’이 없었다고 해도,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 엄연한 범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가 피식민지의 여성들을 도구로 사용하는 운영에 ‘관여’했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일본 정부가 ‘강제성’을 강조하고 집착하는 이유는 뻔하다. 피해자들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다며 ‘매춘부’로 몰아가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국민으로 만들면 엄연한 성 착취와 학대, 학살과 같은 범죄 행위를 표백하기 쉬워진다. 반면 순결한 십대 소녀이거나 강제로 연행된 피해자는 연민과 죄책감의 대상이 돼 피해 사실을 부각시키기 보다 쉬울 수 있다.

그러나 수십만에 달하는 피해자들의 국적이나 나이, 직업, 동원 배경을 ‘소녀’로 단일화하는 것은 ‘순결함’이나 ‘무고함’을 기준으로 인간의 계급을 매긴다는 점에서 역으로 일본의 의도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 중요한 것은 범죄 행위의 여부와 피해 사실이지, 피해자의 정체성이 아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매춘부가 아니라 소녀였다’라는 반박보다, 대상이 누구여도 그러한 행위는 범죄이며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의 인지와 합의일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언제나 여성 인권보다는 민족의 차원에서 다뤄졌다. 영국 여성학자 니라 유발 데이비스에 따르면, 민족은 집단체의 경계를 설정하는 ‘정치적 과정’이고, 정체성 내러티브는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민족기획의 도구이다. 이 지점에서 여성들은 ‘상징적 경계 수비대’가 된다. 민족이라는 상상체로 설정되는 것은 외세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가부장적 공동체이고, 이것은 유린되지 않은 순결한 몸으로 상징된다. ‘위안부’ 여성들은 그 자체로 ‘침해 당한 민족성’을 은유하며 죄책감과 수치심을 자극하는 존재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집회가 처음 열렸을 때 가장 먼저 부닥친 역경이 “왜 부끄러운 일을 들추느냐”는 손가락질이었던 것처럼.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민족 또는 국가가 육체의 소유권을 양도 받는다. 훼손된 것은 민족의 자존심이기 때문에 사죄나 보상도 국가의 관할이 된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 당사자가 배제된 것도 이런 논리 속에 이뤄진 것이다.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과 전시 성폭력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정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최종적ㆍ불가역적 해결’이라는 합의 문구 때문이다. 이 합의를 위해서 공무원들이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일일이 찾아가 설득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란다. 결코 최종적일 수 없는 문제를 섣불리 봉합한 책임을 왜 다시 피해자들에게 전가하는가. 국익을 위해서 개인을 희생하라는 논리는 ‘천황의 충실한 신민’ 되기를 강조하며 ‘위안부’로 동원한 일본과 다를 바 없다.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만 참거나 사라진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전쟁이 나면 특정 대학의 여학생들은 ‘위안부’로 끌고 가야 한다”라는 악플이 달리는 세계에 산다. 이것은 성별, 국가, 민족, 전쟁, 폭력 등의 다양한 문제가 뒤엉킨 엄연한 정치이다. 생존자들이 20여 년이 넘게 이어온 투쟁을 우리는 동정이나 연민, 공분과 같은 감정으로 소비해왔다.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 문제가 ‘나’ 자신의 정치와 어떻게 교차하고 연대하고 공명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말이다.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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