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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세상의 모든 돈

입력
2018.04.09 15:0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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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깨달음을 준다. 살면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영화를 보면서 한 순간에 해결되곤 한다. 개인적으로 최근 경험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올 더 머니’였다. 올해 초 개봉 때 봤지만 그다지 큰 울림은 없었다. 잘 만든 실화 드라마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 전 부가시장에 풀려 다시 본 ‘올 더 머니’는 같은 영화였지만 달랐다. 불현듯 어떤 통찰력을 주었고, 난 이 영화를 통해 이명박 전대통령을 조금이나마 독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돈’(All the Money in the World)이 원제인 이 영화의 소재는 1973년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던 존 폴 게티 3세 유괴 사건이다. 유괴범들은 무려 1,700만 달러의 몸값을 요구했다. 그럴 만했다. 16세 소년 게티의 할아버지 J. 폴 게티는 전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유전 개발을 통해 석유 사업을 시작한 그는 1950년대에 이미 10억 달러 가까운 재산을 소유했다. 그에게 1,700만 달러는 금방이라도 지갑에서 꺼내 지불할 수 있는 푼돈이었다.

그는 최고의 부자이면서 동시에 자린고비 일인자였다. 호텔에 묵을 땐 10달러의 룸 서비스 비용을 아끼려 손수 빨래를 했다. 손님들이 자신의 집에서 장거리 전화 거는 게 아까워 공중전화 부스를 설치했다. 손자의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고 해도 순순히 돈을 줄 리 없었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손자가 자신의 돈을 노리고 자작극을 벌인다고 생각해서다. 여기서 게티의 첫 번째 철학. 그는 인간을 믿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변할 수 있고 실망시키기 때문이다. 게티는 사물에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여기며, 그러기에 번 돈으로 끝없이 미술품을 사 모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몸값 흥정에 들어간 그는 1,700만 달러를 700만 달러로 낮추고 결국 금액은 400만 달러까지 내려가며 100만 달러까지 제시한다. 오히려 납치범이 “욕심 많은 짐승들, 당신들은 최악의 범죄자야!”라며 비난할 지경이다. 지불 방식도 기발하다. 아들과 며느리 게일은 이혼 상태였는데, 게티는 아들에게 돈을 빌려 주며 몸값을 치르라며 이 과정에서 소득 공제를 받으려 한다. 더불어 며느리에게서 손자의 양육권을 빼앗을 속셈이다. 게티의 두 번째 철학. 한 푼이라도 더 건질 수 있다면 거래가 끝난 게 아니다.

이외에도 ‘올 더 머니’엔 MB를 연상시키는 수많은 대목들이 있다. 가늠할 수 없는 재산을 가졌다고 추정되는, 꼼꼼한 셈법으로 거대한 치부를 이룬 재산가. 그럼에도 1억 원 수준의 뇌물도 마다하지 않았고, 자신의 변호사 비용마저 대기업에게 떠넘겼으며, 퇴임 후 의료 보험비로 2만 원을 내던 전직 대통령. 주가 조작과 차명 계좌와 실 소유주 문제와 이권 사업과 탈세와 횡령 등 각종 금전 논란에 휩싸였지만 ‘정직’이 가훈인 이율배반의 인물. 게티도 마찬가지다. “돈이 얼마나 더 있어야 안심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대답한다. “더 많이.” 그는 탐욕의 생육신이었다.

이미 법의 심판을 받고 있는 MB의 인간적 속성을 알기 위해 굳이 이토록 노력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은 ‘MB 류’의 수많은 인간들이 지배하고 있고, 그들의 한계 없는 욕심이 지닌 살상력은 대단하다. ‘올 더 머니’에서 시아버지와 긴 전투를 끝낸 게일은 깨닫는다. 자신은 게티라는 개인이 아닌 거대한 제국과 싸우고 있었다는 걸. 그 깨달음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세상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돈의 신’들은 건재하기 때문이다. 사족 하나. 혹시 LA에 가시면 게티 미술관에 들러 보시길. 제국의 구두쇠가 인류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들이 그곳에 있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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