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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금감원의 ‘야바위 음서제’

입력
2017.09.2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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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서제(蔭敍制)는 조상과 부모의 ‘빽’이 든든한 젊은이에게만 열려 있는 등용문이었다. 과거 없이 관리를 채용하는 제도로, 고려 때엔 왕족과 공신, 5품 이상 고관의 후손을 대상으로 했다. 왕족과 공신의 후손 범위엔 친족과 외척의 먼 후손까지 포함돼 음서의 혜택을 대대로 누렸다. 고관의 후손들도 3품 이상인 경우엔 자손뿐 아니라 수양자와 사위, 조카와 형제까지 혜택을 봤다. 오늘날 공무원과 달리, 왕조시대의 관리는 백성 위에 절대 권한을 갖고 군림하는 상전이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특혜였던 셈이다.

▦ 음서제는 조선왕조에서도 이어졌다. 개국공신으로 이미 고려 말 음서제 개혁을 주장했던 정도전조차도 <조선경국전>에서 ‘장상(將相)과 대신(大臣)은 백성에게 공덕이 있고, 그 자손들은 가훈을 이어받아 예의를 잘 알아 벼슬을 할 만하다고 생각해 문음(門蔭)제를 두었다’며 제도 자체는 옹호했다. 다만 고려 때보다 음서의 범위는 크게 축소됐다. 음서 같은 관료 특채제도는 동서고금의 신분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혈통주의, 신분제 유지라는 사회적 필요, 효율적 공채제도 미비 등의 탓이었을 것이다.

▦ 근대 이후 혈통에 관한 미신이 무너지고 신분제 역시 공식적으로는 폐기되면서 음서도 사실상 사라지게 됐다. 아울러 훨씬 객관적이고 효율적으로 발전한 평가 시스템에 따라 공채 형식의 인재 기용방식이 크게 확대됐다. 하지만 차분히 보면, 음서 같은 비합리적 방식이 줄었을 뿐, 특채는 여전히 일반적인 인재 등용문으로 살아 있다. 미국ㆍ유럽 등에서 지도급 인사의 추천서 한 장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는지만 살펴도 그렇다. 물론 특채가 여전한 건 누구나 납득할 만한 나름의 장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최근 강원랜드에 이어 금융감독원까지 채용비리가 만연한 것으로 드러나자 ‘현대판 음서제’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음서는 그래도 법제화한 제도로서 나름의 객관적 금기나 원칙이 분명했다. 반면, 감사원에 따르면 금감원 임원ㆍ간부들은 애초부터 특채가 아닌 공채를 표방하고서도 지인들의 자제를 합격시키려고 갖은 사기술을 동원해 수많은 공채 지원자들을 기만했다. 기관 위상에 걸맞은 공공의식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상식조차 외면한 이런 비리에는 음서제를 갖다 붙이기도 송구하다. 굳이 붙인다면 ‘야바위 음서제’라고나 할까.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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