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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고려의 금속활자는 왜 혁명이 되지 못했을까?

입력
2017.06.14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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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은 자신들의 찬란한 발명품인 종이ㆍ나침반ㆍ화약ㆍ인쇄술을 강조했다. 중국에 4대 발명품이 있다면, 우리의 최고 발명품은 단연 금속활자가 아닐까! 흔히 ‘직지’로 불리는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의 가치는 인류문명사에 굵은 획을 긋기에 충분하다. 본래 상ㆍ하 두 권으로 된 책이었으나, 현재는 하권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어 낮은 탄식을 불러일으키게 하곤 한다. 그럼에도 그 위상만큼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대단하다.

‘직지’는 고려 말 보우ㆍ나옹과 더불어 3대 고승(麗末三師)으로 추앙받은 백운경한이 스승인 석옥의 찬술을 바탕으로 증보한 책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이란, ‘본래의 마음을 곧장 가리키는 선불교의 핵심’이라는 의미이다. 이 책이 1377년에 간행된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445년에 인쇄된 성서이다. 즉 가장 오랜 책이 불서라면 두 번째 책은 성서인 셈이니 나름 흥미롭다.

1997년 독일 베를린의 G7 회담에서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는 “금속활자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했지만, 인류문화사에 영향을 미친 것은 독일의 금속활자”라고 했다. 즉 최고(最古)는 고려지만 최고(最高)는 독일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최고인 동시에 최고가 되지 못했을까? 또 무엇 때문에 우리의 금속활자는 서구와 같은 출판과 문화 그리고 의식혁명을 동반하지 못했던 것일까?

이 문제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왜 중국이 아닌 고려에서 활자가 발명되었는가’에 대한 의문 해소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중국은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기 때문에 출판시장의 규모 또한 크다. 때문에 활자가 아닌 통판 인쇄를 해서 판이 뭉개질 때까지 책을 찍어도 판매처가 확보된다. 그러나 고려는 중국과 달리 출판시장의 규모가 작았다. ‘직지’ 역시 50∼100부 정도가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량인쇄였다. 소량인쇄를 하는 상황에서 통판으로 작업하고 판을 바꾸게 되면, 시쳇말로 단가를 맞출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 문제를 극복하는 해법이 바로 통판의 분할을 통한 재활용 즉 활자였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활자의 발견은 소량인쇄라는 척박한 현실 속의 간절함이 빚어낸 위대한 창의력의 결과물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면 왜 우리의 활자는 혁명의 들불로 번져 나가지 못했을까? 여기에는 풀어쓰기에 기초하는 알파벳 형태의 로마자와 한자라는 수많은 낱자들의 조합으로 구성되는 한문의 차이가 존재한다. 예컨대 알파벳을 활자로 만들면 26자를 기본으로 e나 s와 같이 많이 사용하는 글자만을 더 추가하면 된다. 이에 비해서 한자는 지(之)나 이(而)처럼 사용 빈도수가 높은 글자가 있다 하더라도, 최소 수천 자 이상의 다양한 활자들을 만들어야만 한다. 즉 같은 활자라도 문자 체계에 따라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금속활자 발명의 빛을 제한하고 퇴락시켰던 이유인 셈이다.

이러한 문제는 한글에서도 책을 조판으로 인쇄하던 1980년대 말까지 계속된다. 즉 모아쓰기 글자인 한글은 로마자보다 훨씬 많은 활자를 가진 복잡한 조판기술을 요구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가 일반화되기 시작하는 90년대 후반부터 상황이 반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휴대폰의 문자와 SNS시대가 본격화하면서 간명한 축약적 편리함 때문에 모아쓰기가 풀어쓰기를 압도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문자 체계에도 시절의 변화에 따른 명암이 존재하는 셈이다. 즉 우리의 금속활자가 세계화되지 못한 것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시절인연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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