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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평범한 풍경

입력
2016.09.0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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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가 되어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았다. 어느 집에서도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없었다. 밖은 아직 밝았다. 여름은 아직 가시지 않았고 습한 공기가 건물 안에 가득 차있었다. 중학교 체육복을 입은 소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소년은 구부정한 자세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복도 끝자락 집으로 들어갔다. 8시가 되자 정장 차림의 여자가 그 집에 들어갔다. 집 안에서 고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잠잠해졌다. 소년이 현관문을 열고 “다녀오겠습니다” 하며 나왔다. 그새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손에 든 홍삼음료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귀가할 때보다 더 큰 가방을 멘 채였다.

아파트 저편에 보이는 한강 물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해가 그 너머로 내려가 주위가 어둑해질 무렵에야 복도는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오는 이들 가운데 검은색 노트북 가방을 든 남자도 있었다. 그는 완전히 힘이 빠진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서 자신의 집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미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나는 할 일을 끝냈지만 조금 더 거기 있기로 했다. 그 아파트에 사는 지인의 애완견을 구경하는 일과, 거기 온 김에 한강 야경을 촬영하는 일이 그 날 내가 할 일이었다.

저녁 9시 반쯤에 택배 기사가 아까 그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냐고 묻는 말을 들었을 법도 하건만 택배 기사는 갈색 상자를 복도에 버려두고 부리나케 뛰었다. 그 시간에도 배송할 화물이 잔뜩 밀린 것이리라. 잠시 후 문이 열리고 TV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는 상자를 집어 들더니 이내 문을 닫았다. 요란한 TV 소리도 함께 빨려 들어갔다. 어둠이 흘렀다. 10시 10분쯤 다시 문이 열렸다. 남자가 그 집에서 나왔다. 헐렁한 반바지 차림이었다. 때마침 돌아가려는 나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다. 그는 손가락에 자동차 열쇠를 걸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남자는 나에게 습관적인 인사를 했다. 내가 아파트 주민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건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들을 모른다는 뜻이다. “아드님을 데리러 가시나 봐요?”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학원 버스가 집 앞까지 오지만, 아들을 하루에 한 번이라도 보려고 거의 매일 데리러 나간다고 말했다. “저녁식사도 같이 못 하시겠어요.” 그는 그럴 여유조차 나지 않는다며 힘없이 웃었다. 우리는 1층에서 내렸다. 남자는 편지함부터 확인해보았다. 그는 아침에 집을 나설 때와 저녁 9시에 귀가할 때, 그리고 밤중에 아들을 데리러 나갈 때와 돌아올 때, 고지서밖에 없는 편지함을 매번 들여다볼 것이다.

아파트 단지 안은 환한 램프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남자가 자동차 열쇠의 원격 버튼을 누르자 주차되어 있던 검은색 중형차가 뽁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눈짓으로 가벼운 인사를 던졌다. 나도 그렇게 했다. 그 활기 없는 남자는 차를 타고 내 앞을 미끄러져 지나갔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나는 별안간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가족 또한 그러하다. 그 가족은 서울의 여느 집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있고,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거의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저녁을 포기했다. 밤 10시가 넘은 그 시간에도 또 다른 택배 기사 한 명이 화물을 가득 안고 아파트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여느 때 보던 모습처럼 정말이지 익숙한 풍경이었다.

역사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빛을 내고 사라져간 한 시대를 몇 마디 문장으로 표현하곤 한다. 1986년엔 다가오는 미래에 들뜬 사람들이 소비에트 연방 대표팀을 응원했다거나, 2002년엔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는 식으로. 마찬가지로 훗날에 이르러 2016년 현재를 돌아본다면 이렇게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저녁 7시가 되어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았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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