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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피랑 99계단에 박경리 있고 윤이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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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피랑 99계단에 박경리 있고 윤이상 있다

입력
2018.03.06 18:0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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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피랑 99계단에서 청년들이 ‘인생 사진’을 찍고 있다. 서포루로 이어지는 계단에는 박경리의 에세이 글귀가 쓰여 있다. 통영=최흥수기자
서피랑 99계단에서 청년들이 ‘인생 사진’을 찍고 있다. 서포루로 이어지는 계단에는 박경리의 에세이 글귀가 쓰여 있다. 통영=최흥수기자

“(통영을)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북쪽에 두루미 목만큼 좁은 육로를 빼면 통영 역시 섬과 별다름이 없이 사면이 바다이다. 벼랑가에 얼마쯤 포전(浦田)이 있고, 언덕배기에 대부분의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들앉은 지세는 빈약하다.” 소설가 박경리(1926~2008)가 ‘김약국의 딸들’에서 묘사한 통영의 모습이다. 빈약한 지세에도 맑고 푸른 바다는 대한민국 문학과 예술계에 걸출한 인물을 낳았다. 통영 땅 어느 한 자락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들의 자취를 돌아보면 그 풍경이 한층 깊어진다.

산양읍 박경리기념관 옆 정원의 동상.
산양읍 박경리기념관 옆 정원의 동상.
묘지로 오르는 길가에 놓인 벤치에 앉으면 푸른 통영 바다가 보인다.
묘지로 오르는 길가에 놓인 벤치에 앉으면 푸른 통영 바다가 보인다.
박경리 묘지로 오르는 산책로에 홍매화가 만개했다.
박경리 묘지로 오르는 산책로에 홍매화가 만개했다.

먼저 산양읍 남쪽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박경리기념관이 터를 잡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2010년 5월 5일에 문을 열었다. 적갈색 벽돌과 통유리로 마감한 건물 내부에는 그의 대표작인 ‘토지’ 친필 원고와 여권, 편지 등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김약국의 딸들’에서 묘사한 통영의 옛 모습을 미니어처로 재현한 장식이 무엇보다 눈에 띈다. 기념관 옆 정원에는 실제보다 작아 보이는 그의 동상이 언덕 아래 바다를 향하고 있다. 홍매화가 피어 있는 산책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그의 묘소를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생전에 하룻밤 묵었던 펜션 바로 옆이다. 선생이 통영에 오면 언제든 방을 비워 놓겠다고 했던 펜션 주인장이 결국 묘 자리를 내주는 것으로 약속을 지키게 됐다는 것이 기념관 해설사의 설명이다. 묘소까지 지그재그로 오르는 아담한 산책로에 봄볕이 따스하고, 군데군데 놓인 벤치에 앉으면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지는 바다색이 곱다.

통영항 건너편 해핑이 바닷가에 자리한 김춘수유품전시관 내부.
통영항 건너편 해핑이 바닷가에 자리한 김춘수유품전시관 내부.
전시관 앞 바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통영 시내 모습이 정겹다.
전시관 앞 바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통영 시내 모습이 정겹다.

박경리기념관에서 신봉마을을 거쳐 산양일주도로를 왼편으로 돌면 충무교 인근에 김춘수(1922~2004)유품전시관이 있다. 1층에는 ‘꽃’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등 그의 대표작과 함께 미륵산에서 통영 전경을 찍은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바다는 나의 생리의 한 부분처럼 되었다. 바다, 특히 통영(내 고향) 앞바다-한려수도로 트인 그 바다는 내 시의 뉘앙스가 되고 있다고 나는 스스로 생각한다”는 문구에 그의 고향 사랑이 묻어 있다. 2층에는 친필 원고와 서예작품, 가구 등 생전에 사용하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도 아니고 기념관도 아닌 공간의 성격처럼 전시는 다소 산만하다. 전시관 앞은 그의 시 ‘통영읍’에 나오는 ‘해핑이’ 바닷가다. 작은 어선이 정박한 좁은 물길 건너편으로 보이는 시내 풍경이 정겹다. ‘통영읍’에는 ‘유약국 집 둘째’ 청마 유치환과 ‘푸르스름 패랭이꽃 그리고 윤이상’도 등장한다.

청마문학관 입구에서 유치환과 당대의 통영 예술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청마문학관 입구에서 유치환과 당대의 통영 예술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문학관 위편에 복원한 유치환 생가 ‘유약국’.
문학관 위편에 복원한 유치환 생가 ‘유약국’.

유치환(1908~1967)의 생과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청마문학관은 통영항의 동쪽 끝자락 언덕에 자리 잡았다. 문학관 입구의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예술인의 고향 통영의 힘을 짐작하게 한다. 1945년 가을 미륵산 기슭에서 찍은 사진에는 청마와 윤이상, 김춘수를 포함해 당대의 화가ㆍ연극인ㆍ문화운동가 등 통영의 대표 예술가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그의 시작(詩作)과 유품을 모아 놓은 전시관은 그다지 크지 않다. 실제 유품은 거제 둔덕면 방하리의 청마기념관이 더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거제 방하리는 청마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그의 출생지를 놓고 법정 다툼까지 갔지만 통영시와 거제시 그리고 유족 간의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문학관 바로 위에는 그의 생가(로 알려진) ‘유약국’을 복원해 놓았다.

윤이상기념관의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동백림 사건으로 법정에 선 모습이다.
윤이상기념관의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동백림 사건으로 법정에 선 모습이다.
윤이상의 베를린 침실에 걸려 있었다는 통영항 사진.
윤이상의 베를린 침실에 걸려 있었다는 통영항 사진.
윤이상의 베를린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베를린하우스.
윤이상의 베를린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베를린하우스.

통영을 대표하는 음악가 윤이상기념관은 시내 도천동에 있다. 김춘수유품전시관에서 바다 건너편이다. 세계 음악계에서 윤이상(1917~1995)의 위치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독일 자르브뤼켄 음악방송국에서 선정한 20세기 100년간의 30인,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 선정 사상 최고의 거장 44인(20세기 인물 중에는 단 4명 포함)에 들었다는 것은 이미 뉴스도 아니다. 고전음악의 본고장 유럽에서 그의 이름은 흥행과 직결된다. 지난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유럽 투어에 나선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는 윤이상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보훔ㆍ함부르크ㆍ하노버 등의 대형 공연장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윤이상은 여전히 이념 논쟁의 인물이다. 2010년 개관한 기념관이 지명을 딴 ‘도천테마기념관’으로 불려 오다가 그의 탄생 100주년인 지난해 9월에야 ‘윤이상기념관’으로 제 이름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달 23일에는 사후 23년 만에 그의 유해가 통영으로 돌아왔다. 고향 바다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전의 바람에 따라 30일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에 맞춰 통영국제음악당 인근 공터에 안치할 예정이다.

윤이상기념관 앞 공원에는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으로 법정에 섰을 때의 그의 모습과 함께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950년에 통영항을 찍은 대형 흑백사진이다. 그의 베를린 자택 침실에 걸려 있었다는 설명에 콧등이 시큰해진다.

서포루를 배경으로 한 일몰 풍경.
서포루를 배경으로 한 일몰 풍경.
서피랑에서 본 동피랑 벽화마을 모습.
서피랑에서 본 동피랑 벽화마을 모습.
동백꽃으로 장식한 피아노계단.
동백꽃으로 장식한 피아노계단.
계단에는 박경리의 ‘생명의 아픔’ 글귀가 쓰여 있다.
계단에는 박경리의 ‘생명의 아픔’ 글귀가 쓰여 있다.

사진은 기념관에서 멀지 않은 서포루에서 찍은 모습이다. 통영성(城) 서쪽에 있는 포루인 이곳은 요즘 서피랑(서쪽 비탈)으로 더 알려졌다. 통영항을 기준으로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과 마주보고 있는데, 언덕배기에 송이버섯처럼 들어앉은 집들의 모습은 ‘김약국의 딸들’에서 묘사한 그대로다. 서피랑에는 간접적으로나마 박경리와 윤이상이 공존하고 있다. 석양이 아름다운 꼭대기 누각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비탈에는 동백꽃으로 장식한 피아노계단이 설치돼 있다. 따로 설명이 없어도 윤이상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옆 99계단은 박경리의 에세이 ‘생명의 아픔’에서 따온 글귀로 장식했다. 젊은 여행자들이 ‘인생 사진’을 찍는 곳이기도 하다. 그 인생의 틀 안에 통영의 문학적 예술적 감성도 함께 담았으면 좋겠다.

통영=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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