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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은 프로야구 선수, 겨울에 몸을 잘 만들어야 여름 버텨

입력
2016.06.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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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논에서 이앙기를 이용한 모내기 작업이 한창이다. 이앙기는 간단하고 가벼운 구조로 돼 있지만 대당 2,000만원을 상회한다.
주변 논에서 이앙기를 이용한 모내기 작업이 한창이다. 이앙기는 간단하고 가벼운 구조로 돼 있지만 대당 2,000만원을 상회한다.

배 고파서 그런가. 고추밭에서 일어설 때마다 살짝 어지러웠다. 더위 탓인지 몸이 약해진 건지 이유를 생각해보다가 원래 그랬던 것으로 결론 내렸다. 그래, 내 몸은 그래왔다. 불리한 신체조건으로 뜨거운 여름 거뜬히 보내려면 겨울을 잘 보냈어야 했다. 프로야구 선수처럼 동절기에 몸을 잘 만들어 놔야 잘 버틸 수 있는 법이다.

하드트레이닝을 하거나 근육을 만드는 건 의미 없다. 농사꾼의 겨울은 닥치는 대로 잘 먹고 잘 쉬었어야 한다. 근질근질해서 몸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로 잘 쉬어야 ‘나는 일하고 싶은 놈’이라는 착각도 하고, 그 덕에 짧은 봄 긴 여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헌데 지난 겨울 약간의 질환이 있었고 조절할 것이 많았다. 이거 저거 가려 먹으라는 것이 많았고,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금기 음식은 평소 힘을 내기 위해 즐겨먹는 것들이었다. 아무래도 그 영향도 있는 듯 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생긴 육체적 약화과정과 먹고 싶은 것을 눈으로만 즐겨야 하는 심리적 불안정이 이 여름에 악영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건강하려면 건강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그렇다 치고 얘는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옮겨 심을 때 약간 작다 싶었던 고추는 내내 작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추가 작은 게 아니라 고추나무가 작았다. 고추는 오히려 몸뚱이에 비해 컸다. 처음 달리는 고추를 따 줘야 나무가 큰다는 얘기를 들었다. 고추를 재배하는 이유는 빨갛게 익은 놈을 수확해서 고춧가루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인데, 시퍼렇고 단단한 풋고추를 따내자니 마음이 아팠다.

다른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나는 마음만 아프지, 따이는 고추는 얼마나 몸살을 앓을까. 다 익지도 않은 것을, 단지 개인적인 기준에 딱 맞지 않는 다고 해서 살아있는 생물을 이리 저리 재단하는 게 옳은 것인가. 고추만 그런 게 아니다. 감나무도 가지가 너무 많다고 잘라내고, 감자꽃은 뿌리에 도움 안 된다고 없애버리고, 마늘쫑도 마찬가지로 뽑아버린다. 사랑니, 편도, 맹장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기능도 속속 밝혀지고 있다. 본래 작물의 생장과정을 무시하고 수확 위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농사에서 왠지 사디즘의 냄새가 난다.

모내기를 앞두고 마을 어르신이 트랙터를 이용해 논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동안 배수로를 통해 물이 빠져나가고 있다. 모내기를 끝내고 다시 물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물 한 방울이 아쉽다.
모내기를 앞두고 마을 어르신이 트랙터를 이용해 논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동안 배수로를 통해 물이 빠져나가고 있다. 모내기를 끝내고 다시 물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물 한 방울이 아쉽다.

한 시간 정도 작업하고 나니 장화가 뜨거웠다. 발은 따뜻한 게 좋다고들 하지만 그건 머리가 시원할 때 얘기다. 쪼그려 앉으니 허벅지에 눌린 장딴지의 표면적이 넓어졌고, 고무장화라지만 잘 늘어나는 특성은 없어 혈류가 막히고 발은 밀폐 상태에 놓이게 된다. 시원한 슬리퍼를 신으면 좋으련만 아침에 뱀 두어 마리와 마주치고 나면 운동화도 겁난다. 장화 책임자에게 서운한 것이 있다. 신발은 발의 길이에 따라 골라 신을 수 있게 만들면서, 반 이상이 다리 부분인 장화를 장딴지 굵기에 상관 없이 제작 판매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모르겠다. 세상에 규격에 맞는 일반인만 사는 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

논에 받기 시작한 물이 얼추 논두렁을 적셨을 것 같아 농장을 나서 논에 도착했다. 주황색 물장화를 신는데 손으로 잡은 부분이 쭉 찢어졌다. 너무 힘을 줘서 그랬겠지만 그렇게 너무 힘을 주지 않으면 다리가 들어가지도 않는다. 5년간 주인 잘못 만나 고생 많았는데 그렇게 순직하고 말았다. 새로운 장화를 사서 다시 조금씩 늘려야 한다는 생각에 미리 피곤했다. 그냥 맨발로 논에 들어갈까 하다가 거머리도 겁나고 해서 어렵사리 묶고 들어갔다.

논으로 들어가 논두렁을 밟기 시작했다. 매년 물이 새어 나가 논바닥이 드러나고 잡초가 벼를 이기는 상황을 올해는 바꾸고 싶었다. 논두렁 조성기로 단단히 작업을 했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어 추가 작업을 했다. 물과 논두렁이 만나는 부분을 발로 밟고 손으로 쳐 발랐다. 신체의 특성 중 드물게 장점이 발휘되는 때이다. 남들보다 넓은 발바닥과 손바닥에 통나무 가슴에서 전달되는 힘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일을 해 나갔다. 비교적 낫다 뿐이지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 10센티미터 남짓한 발바닥 폭으로 총 길이 250미터의 논두렁을 반씩 겹쳐가며 밟으려면 5,000번의 발질이 필요하다. 1초에 한 번으로 쳐도 1시간 반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손으로 ‘쳐발쳐발’ 해줘야 한다.

미꾸라지와 우렁이 등 먹이를 찾아 날아온 황로들이 논 주인이 떠나기를 기다리며 논두렁에 앉아 대기하고 있다.
미꾸라지와 우렁이 등 먹이를 찾아 날아온 황로들이 논 주인이 떠나기를 기다리며 논두렁에 앉아 대기하고 있다.

절반쯤 했을까 싶을 때 물꼬를 보니 넘치듯 들어와야 할 물이 멈춰 있었다. 뭐가 막혔을까 싶어 가보니 물이 들어오도록 수로에 막아 놓은 흙 주머니를 누군가 치워놨다. 저 아래쪽 논 임자가 물을 받으려고 저지른 만행이다. 다시 수로를 막아두려는데 포대 입구에서 뱀이 머리를 내밀었다. 자빠질 뻔하다가 끝내 자빠졌다. 젖은 바지는 둘째치고 어찌해야 하나 싶다가 옆의 큰 돌을 두 손으로 집어 내리쳤다. 살생을 가려서 하는 편이고, 물뱀은 독이 없다는 얘기도 있지만 누군가 또 자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침에 트럭 사이드 미러에 걸친 거미를 바람에 날려보낸 것도 마음이 아팠는데 또 한 생명을 보내니 일할 맛이 싹 가셨다.

손 작업은 미루고 다시 농장으로 향했다. 조금 쉬었다가 고구마를 마저 심을 생각이었다. 차를 대고 내리는데 뻐꾸기 소리가 들렸다. 전화기에서 매시 정각을 알리는 소리가 아니라 농막 바로 뒤편에서 나는 라이브 음향이다. 게다가 오랜만에 기분 좋은 소리를 들었다. 그냥 ‘뻐꾹’이 아니라 ‘뻐뻐꾹’ 이다. 어려서 듣던 새타령에서 가수 김세레나 아주머니가 ‘저 산으로 가면 뻐뻐꾹’ 한다고 자주 노래했지만 실제로는 듣기 힘든 편이다. 해서 뻐꾸기가 울면 일손 멈추고 ‘뻐뻐꾹’ 하기를 기다리게 되고 한 번 그리 울어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다시 농막으로 향하다가 슬쩍 고개 돌려 매화나무를 보니 매실이 포도처럼 달렸다. 딱히 뿌린 것도 없고 쳐 준 약도 없는데 기특하게도 많이 달렸다. 남들은 매실 크기를 위해 솎아준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냥 효소로 담글 예정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혹시’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나무가 병들거나 힘들어지면 솔방울을 많이 만들어 종족보존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저 매화나무도 살기 힘들어 확 쏟아내고 가려고 저리 많이 매단 것이 아닌가 싶었다. 최근 지구 온난화에 북극곰 개체수가 늘었다는 얘기를 듣고도 적응을 해서가 아니라 소나무 같은 경우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어쨌든 어쩌랴, ‘올 겨울에는 거름을 좀 주겠노라’는 생각으로 나무를 달랬다.

모내기를 앞두고 모판이 출격대기를 하고 있는 가운데(사진 아래) 마을 어르신이 트랙터를 이용해 논의 높낮이를 조절하며 써래질을 하고 있다.
모내기를 앞두고 모판이 출격대기를 하고 있는 가운데(사진 아래) 마을 어르신이 트랙터를 이용해 논의 높낮이를 조절하며 써래질을 하고 있다.

시선을 나무에서 돌리려는데 그 뒤 고추밭에서 뭔가 움직임이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보니 간전댁할머니가 고랑의 풀을 매고 계셨다. “할머니! 또 오셨대요. 말씀도 없이 오시는 게 어딨어요 그래.” 할머니는 웃으며 답하셨다. “또 온다고 하면 오라간디요.” 당연히 오시지 말라고 할 터였다. 전 날도 할머니한테 당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위로 솟은 감나무 가지를 잘라달라고 하셔서 몇 개 쳐드리고 나니 그 자리에서 감잎을 뜯으셨다. “선재 즈그 어매 얘기해서 조금이라도 차를 덖어야지” 하시길래 “들고 가시기 힘들 테니 전화하세요. 바로 올게요” 하고 농장으로 갔다. 몇 시간 지나 할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선재아빠 지금 많이 안 바쁜가요?” 감잎을 다 따셨나 보다 하고 가겠노라고 달려갔다. 트럭에서 내리려고 하는 순간, 할머니는 지금까지 봤던 모습 중 가장 신속한 동작으로 차에 올라타셨다. “감잎은요?”하고 놀라서 여쭈니 “집에 올려다 놨응게 농장으로 가세요”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낚인 거다. “선재네 농장이 궁금해서 못살겠응게 어여 가요.” 할머니의 표정도 단호했다. 어쩔 수 없이 출발하며 룸 미러로 보니 그제서 웃으신다.

그러시고는 오늘 또 오신 거다. 말씀도 없이 걸어서 오셨다. 할머니가 농장에 오시면 사실 나는 죽어난다. 한 시간 일하면 30분은 쉬어야 하는데 할머니의 지구력은 쉼표를 허락하지 않는다. 나 혼자 쉴 수도 없고 맞춰서 일하다 보면 그날 잠자리는 신음을 동반한다.

휴식을 포기하고 바로 할머니 옆 고랑에 앉아서 풀을 매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중천인 오후는 금새 온 몸을 덥혔다. “할머니 많이 더워요” 하니 “날이 어제 보담 따땃하네요. 추운 것 보담 낫잖애요?” 하셨다. 물으신 건지 주장하시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땀이 많이 나잖아요” 하니 “땀 나는 게 나쁜 가요? 눈으로 들어가 귀찮아 그러지” 하셨다. 질문이 아닌 게 분명해졌다. 나도 질문이 아닌 것을 질문처럼 여쭸다. “힘들지 않으세요?” 할머니는 즉답을 하셨다. “노는 것 보담은 힘든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방에 누워만 있어도 허리 아픈 벱인디.” 문득 할머니 정체가 다시 궁금해졌다.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며 뉘엿뉘엿 떨어지니 모기가 한 두 마리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기에 물리면 가려운 곳에 영국 국기를 그리다가 손톱으로 도려내고 싶어진다. 그리고는 이내 일 하고자 하는 의욕을 꺾기 까지 한다. 특히 밭일 하느라 쪼그려 앉은 상태에서 엉덩이 아래 접히는 선 부위를 물리면 서 있는 자세로는 긁기도 힘들어 이내 환장하고 만다. 할머니에게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선선해져서 일 할만 하니까 모기가 나오네요.” 할머니의 어조는 동일했다. “모구두 움직이기 좋응게 나오겄지라.” 할머니는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하다.

할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오니 D동생이 전날 놓고 간 물건을 찾으러 와 있었다. 논에 물 잡는 일이 힘들다고 얘기하니 동생이 말했다. “행님,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고 구멍 나면 빠져나가는 것이 순리고 법이다요. 보세요.” 동생은 볼펜을 꺼내 들었다. ‘순(順)’자는 내(川)가 흐르는 대로 머리(頁) 쳐들지 않고 고분고분 하라는 거고요, ‘법(法)’자도 물(水)이 가는(去) 이치라고 허잖애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쇼. 머 할라고 죽을 똥 살 똥 애쓰고 산다요.” 돈 버는 방법 빼고는 아는 게 많은 친구인데 대꾸해주기 싫었다.

[구례일기44-11] D동생이 차를 대접하겠다고 집으로 초대해 거문고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돈 버는 것 빼고는 재주가 많은 친구다.
[구례일기44-11] D동생이 차를 대접하겠다고 집으로 초대해 거문고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돈 버는 것 빼고는 재주가 많은 친구다.
농장에서 늦게까지 고구마를 심던 날 D동생이 저녁거리를 준비해 와 농막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농장에서 늦게까지 고구마를 심던 날 D동생이 저녁거리를 준비해 와 농막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맞장구를 안 쳐줘서 그랬을까 헛소리를 보탰다. “행님 근디 걱정이요. 그 검산지 변호산지 하는 그 놈들 말여요. 100억이 어쩌구 오피스텔이 어쩌구 하는 그 놈들. 그렇게 밥 값도 지대로 못하고 사는 놈덜이 내 감 사 묵을까 봐 농사 짓기가 싫어져요. 강남역 큰 애기도 그렇고, 지하철 애기도 짠허고…… ” 그냥 일 하기 싫다는 말을 길게 한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까요. 너무 순하게 살아서 그라까요? 확 엎어부까요?” 순리와 법에 어긋나는 얘기다. 그냥 잠시 쉬어야겠다.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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