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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쌤, 엄마한테는 말 못했는데요..” 따뜻한 말 한마디에 목마른 거리 청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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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쌤, 엄마한테는 말 못했는데요..” 따뜻한 말 한마디에 목마른 거리 청소년들

입력
2017.10.16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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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개조한 쉼터에서 대화

아이들, 가정ㆍ학교서 말 못하는

학교폭력ㆍ임신 등 고민 털어놔

‘쌤’으로 불리는 거리상담사들

“훈계보다는 경청… 정서적 지지”

상근자 7명이 작년 1만여명 만나

지난 13일 밤 의정부시일시청소션쉼터 '포텐'을 찾아온 선아(17·가명)와 전종수 소장(가운데)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지현 기자
지난 13일 밤 의정부시일시청소션쉼터 '포텐'을 찾아온 선아(17·가명)와 전종수 소장(가운데)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지현 기자

선아(17ㆍ가명)는 학교밖 청소년이다. 새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아 방황했고, 중학생이던 3년 전 ‘왕따’ 생활에 질려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았다. 가출한 적도 있다. 하지만 선아에겐 고비를 겪을 때마다 찾는 ‘쌤(선생님)’이 있다.

지난 13일 밤 11시. 선아는 다시 쌤을 찾아왔다. 따뜻한 ‘말’을 나누고 싶어서. 선아의 쌤은 학교 교사가 아닌, 전종수 의정부시일시청소년쉼터 소장이다. ‘불금(불타는 금요일)’ 밤, 경기 의정부 행복로 미디어루프 골목에 주차된 일시청소년쉼터의 이동형버스 ‘포텐’과 간이 부스에는 마음 둘 곳 없는 거리 청소년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에게 ‘쌤’인 아웃리치 요원(거리상담사)들과 마음을 나누기 위해서다. 부산ㆍ강릉 여중생 폭행 사건 등을 통해 학교밖 청소년들이 ‘괴물’로 묘사되곤 하지만, 이들이 지금의 모습이 될 때까지 손잡아 줄 어른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선아는 쌤에게 이날 큰 결심을 알렸다. 남자친구(22)와 사이에서 두 번째 임신을 했고, 이번에는 낳기로 했다. 2년 전 임신 사실을 엄마에게 고백하자마자 다짜고짜 붙들려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받아야 했던 선아에겐 엄마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는 게 너무 ‘무서운 일’이라고 했다. 고민하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아기의 심장소리를 들었을 때 낳아서 잘 키우자고 남자친구와 약속했다. 선아는 쌤에게 휴대전화에 저장된 초음파 동영상을 보여줬다. “산부인과에서 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아기가 움직여요. 고작 2~3cm인데. 심장소리 들어보실래요?”

4시간이 넘도록 긴 얘기를 나눈 후 선아는 더 늦기 전에 임신 사실을 엄마에게 알리기로 했다. 쌤은 “앞으로 겪게 될 몸과 정신적 변화들이 있을 텐데 시간이 지나서 엄마에게 알리게 되면 부모님의 배신감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해줬다. 선아는 “쌤은 제 얘기를 잘 들어줘서 새아빠보다 더 아빠같다”고 했다.

이날 포텐을 찾은 아이들은 가출 청소년 7명을 포함한 83명. 선아처럼 장시간 고민을 털어놓은 아이들도 있고, 그저 쌤이 보고 싶어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폭력 피해자인 나리(19ㆍ가명)는 대학생이 된 후에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계속되는 동창생들의 언어폭력 때문에 이 곳을 찾았다. 일용직 근로자인 동철(21ㆍ가명)씨는 가정불화로 4년째 가출 중인데, 최근 부모로부터 ‘인연을 끊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방황을 끝내고 일자리를 구하려 노력 중이던 차에 다시 한번 ‘생채기’가 생긴 것이다.

정영민 의정부일시청소년쉼터 팀장(사회복지사)은 “이들이 바라는 것은 따뜻한 지지”라고 했다. 거리 청소년마다 개별 상황은 달라도 가정에서나 사회(학교)에서나 유대가 없고 취약한 게 공통점이다. 그래서 포텐의 아웃리치 요원들은 거리 청소년들이 당면한 문제를 인식하고 스스로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정서적 지지를 해주고, 정신적ㆍ신체적인 안전을 도모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정 팀장은 “훈계하고 지시하기보다 차분히 들어줘야 한다”며 “학교나 가정에서 경험하지 못한 지지(경청)를 얻는 것만으로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아웃리치 요원들과 청소년들의 만남은 상담이 아니라 ‘위기 개입’이라고 부른다. 전 소장은 “아웃리치는 가정이나 사회(학교)에서 내쳐진 아이들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먼저 만나고 손을 내미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며 “지속된 활동으로 라포형성(상호신뢰관계ㆍRapport Building)이 되면 위기 상황에서 스스로 도움을 요청해오는 경우가 많아 위기 탈출을 돕고 적절한 사회서비스와 연계해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13일 밤 의정부시일시청소션쉼터 '포텐'에서 지구덕 한서중앙병원 병원장(왼쪽)이 한 청소년과 진로 상담을 하고 있다. 김지현 기자
지난 13일 밤 의정부시일시청소션쉼터 '포텐'에서 지구덕 한서중앙병원 병원장(왼쪽)이 한 청소년과 진로 상담을 하고 있다. 김지현 기자

올해로 5년째 자원봉사 상담을 하는 지구덕 한서중앙병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청소년은 성인에 비해 회복탄력성(마음의 근력ㆍResilience)이 높기 때문에, 골든타임에 긍정적 위기 개입을 해주는 이가 많아질수록 사회 재진입 사례도 늘어날 수 있다”며 “학교도 가정도 포기한 조현병을 앓는 학생을 포텐에서 만나 꾸준히 치료하는 중인데 최근엔 건강 상태도 좋아지고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합격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포텐의 경우 전 소장을 포함한 상근자 7명이 거리 상담에 뛰어든 결과 지난해에만 약 1만여명의 청소년들을 만났다. 의정부 지역은 거리 청소년들이 많이 집결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45인승 버스를 개조해 응급의료 장비와 비상약 등을 갖췄고, 화ㆍ수ㆍ목요일은 오후 3시~11시, 금요일은 오후 7시30분부터 토요일 새벽 5시까지 문을 연다. 특히 금요일엔 의정부 지역 의사나 간호사들이 돌아가며 의료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포텐과 같은 이동형 일시쉼터는 전국 10곳, 아웃리치 전담요원은 30여명에 불과하다. 아웃리치 종사자들의 업무 과중과 열악한 처우(사회복지시설 임금의 66% 수준)로 인해 근속비율이 높지 않은 것도 문제다.

여성가족부는 일단 내년부터 아웃리치 요원을 6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양철수 여가부 청소년자립지원과장은 “사각지대에 있는 거리 청소년 발굴을 위해 시설 중심이 아닌 ‘찾아가는 거리 상담’ 활성화로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꿀 계획”이라며 “앞으로 지방 중소도시를 거점으로 아웃리치 요원을 4인 이상 배치해 전국 300명 이상으로 늘려 청소년 위기 개입을 강화해 가겠다”고 말했다.

글ㆍ사진=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의정부시일시청소년쉼터 '포텐'은 매주 금요일 오후 7시30분터 토요일 오전 5시까지 의정부시 행복로 미디어루프 앞에 부스를 차리고 거리청소년들을 만난다. 의정부시일시청소년쉼터 제공
의정부시일시청소년쉼터 '포텐'은 매주 금요일 오후 7시30분터 토요일 오전 5시까지 의정부시 행복로 미디어루프 앞에 부스를 차리고 거리청소년들을 만난다. 의정부시일시청소년쉼터 제공
의정부시일시청소년쉼터 '포텐'을 찾은 청소년들이 상담을 하고 있다. 의정부시일시청소년쉼터 제공
의정부시일시청소년쉼터 '포텐'을 찾은 청소년들이 상담을 하고 있다. 의정부시일시청소년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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