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천운영의 심야 식탁] '잔치의 선포' 빠에야

알림

[천운영의 심야 식탁] '잔치의 선포' 빠에야

입력
2017.08.09 04:40
0 0
잔치의 시작을 알리는 빠에야. 빠에야 판이 달아오르고 기름 연기가 솟구치면 잔치가 시작된다. 소설가 천운영 제공
잔치의 시작을 알리는 빠에야. 빠에야 판이 달아오르고 기름 연기가 솟구치면 잔치가 시작된다. 소설가 천운영 제공

잔칫집이라면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이 있다. 그걸 내놔야 뭔가 잔치를 치렀다 싶고, 그걸 먹어야 어쩐지 잔치에 다녀왔다 싶은 음식. 나로서는 단연 홍어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바로는 그렇다. 잔치하면 홍어, 홍어하면 잔치, 홍어 잔치하면 오빠의 결혼식이 저절로 따라온다. 오빠의 결혼식 음식은 집에서 직접 준비하기로 했다. 잔치다운 잔치를 하겠다는 아버지의 선언 때문이었다. 잔치 음식 준비는 좋은 홍어를 수소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홍어는 도착하는 대로 차곡차곡 항아리로 들어갔다. 홍어를 관리하는 일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항아리를 지키는 파수꾼 같았다. 홍어 항아리는 잔치의 선포였다.

결혼식 전날, 동원될 수 있는 모든 여자들이 집으로 모였다. 소쿠리야 솥 단지야 주방기구들도 최대한 끌어 모았다. 지지고 볶고 삶고 썰고. 안방이며 거실이며 목욕탕이며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기름 냄새 고기 냄새 왁자한 웃음소리. 정말 잔칫집 분위기가 났다. 하지만 흥겨운 것도 딱 반나절. 오후로 접어들면서 슬슬 원망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에는 독재니 폭정이니 하며 폭동이라도 일으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버지가 홍어 항아리 뚜껑을 연 순간, 그 모든 원망은 잘 삭은 홍어 냄새에 묻혀버렸다. 홍어를 썰기 시작했다. 잘 삭았나 보려고 한 점, 자투리는 자투리라 한 점. 썰고 또 썰고. 썰랴 입에 넣으랴. 맥주병을 따라 막걸리를 사와라, 홍어에 묵은지가 빠질 수 있나. 누구네 집 묵은지가 남았다더라. 삶은 고기 좀 더 내와라. 콧등을 썰어라, 탕을 끓여라. 이게 잔치지 뭐가 잔치냐. 머리부터 발끝까지 뻥 뚫리는 듯한 이 기막힌 냄새라니. 고된 노동 후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처럼, 삭힌 홍어 한 점에 모든 피로가 싹 가셨다. 결혼식 당일. 예식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홍어가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다는 것. 남은 홍어는 고스란히 우리 몫이었다. 아무리 홍어라지만 매일매일이 곤혹스러운 잔치였다. 입천장이 다 까질 지경이었다.

유난히 기념하는 것도 많고 축제도 많은 스페인. 성탄절이니 부활절이니 성체절이니 하는 전국적인 종교 축제는 물론, 여름이 왔으니 겨울이 왔으니 등등의 지역 주민끼리의 소박한 잔치가 시시때때로 열린다. 잔치가 시작되는 걸 알리는 것은 단연코 빠에야(Paella)다. 빠에야는 넓고 납작한 모양의 둥근 무쇠 팬을 가리킨다. 손바닥만한 것부터 장정이 들어가 누울 정도로 큰 것까지 크기도 다양하다. 또한 빠에야는 그 빠에야 판에 한 모든 음식을 지칭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빠에야는 해산물과 쌀을 중심으로 한 발렌시아 요리이다. 쌀 대신 빵 조각이나 국수를 넣은 요리도 있다. 내륙 지방에서는 해물 대신 토끼고기와 닭고기 초리초 등을 넣어 빠에야를 만든다. 그 안에 무엇을 넣든, 대형 빠에야를 밖에 내놓는다는 것은 잔치의 선포와도 같다. 아버지의 홍어 항아리처럼. 뚜껑이 열리고 홍어 냄새로 잔치가 시작되듯, 사람들은 빠에야 연기를 보고 잔치가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성탄절 스페인에서 만난 대형 빠에야 판. 잔치의 선포다. 자루째 부은 빵 조각을 휘저으려 삽이 동원됐다. 이렇게 만든 요리는 짭쪼름한 미가스(Migas)다. 소설가 천운영 제공
성탄절 스페인에서 만난 대형 빠에야 판. 잔치의 선포다. 자루째 부은 빵 조각을 휘저으려 삽이 동원됐다. 이렇게 만든 요리는 짭쪼름한 미가스(Migas)다. 소설가 천운영 제공

스페인에서 요리를 배울 때, 시장 사람들과 함께 대형 빠에야를 만든 적이 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날이 여름의 시작인 날이어서, 여름맞이 잔치를 한다는 것이었다. 잔치를 하기에는 빠에야 만한 것이 없으니까. 시장 사람들은 각자의 상점에서 팔고 있는 고기며 해산물이며 채소들을 내놓았고, 우리는 그것들을 모아 씻고 다듬어서 요리를 했다. 빠에야 판을 보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연기가 오르고도 완성되려면 두어 시간은 족히 걸릴 텐데, 사람들은 그 옆에 서서 차례차례 구워지는 재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완성된 빠에야 한 그릇을 먼저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온 과정을 지켜보는 것으로 잔치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처럼. 누룽지 하나 없이 싹싹 비운 빠에야를 보았을 때, 그 뿌듯함이란. 아무래도 가을맞이 빠에야 잔치를 한번 해야 할 모양이다.

소설가

빠에야를 기다리는 사람들. 요리 과정을 지켜 보는 것으로 잔치에 참여하려는 것일까. 천운영 제공
빠에야를 기다리는 사람들. 요리 과정을 지켜 보는 것으로 잔치에 참여하려는 것일까. 천운영 제공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