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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회장님을 잘 모시는 법

입력
2017.01.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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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국정조사 1차 청문회에 기업 총수들이 선서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국정조사 1차 청문회에 기업 총수들이 선서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신이 날 살렸군. 정말 고맙네.”

한 대기업 회장이 최근 대관(對官) 담당 임원에게 한 말이다. 이 곳도 다른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지난해 최순실씨 측으로부터 거액의 지원을 요청 받았다. 최씨는 2020년 도쿄올림픽 비인기 종목 유망주의 해외 전지 훈련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최씨 측은 당시 무려 80억원을 요구하며 이 그룹의 해외 법인에서 독일로 직접 송금해 줄 것을 부탁했다. 금융 당국의 감시망을 피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의심할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더구나 입금처인 독일의 비덱은 최씨와 딸(정유라)이 지분 100%를 가진 개인 회사였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이 돈을 줄 경우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다. 거절하는 게 맞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전화가 와 진행 사항 등을 챙긴다면 기업으로서는 대 놓고 거절할 수도 없다. 정권에 밉보일 일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 이럴 땐 꾀를 부리는 게 상책이다. 이 업무를 담당한 임원은 사업의 구체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금액이 너무 과도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투자비를 30억원으로 줄인 뒤 해외 송금 불가 등의 역제안을 했다. 최씨 측이 받을 수 없는 조건을 내 세워 사실상 거절을 한 셈이다. 뜻대로 안돼 뿔이 난 최씨는 이 그룹에 더 이상 지원금을 요청하지 않았다.

담당 임원의 현명한 대처로 이 그룹은 최씨의 마수를 피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그룹의 회장도 지난달 다른 그룹 회장들과 함께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했다. 그러나 의원들 질의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모 대기업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일을 처리했다. 이 곳도 최씨의 요청을 받았다. 2020년 도쿄올림픽을 위해 승마 선수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명분도 비슷했다. 직접 비덱으로 송금해 줄 것을 요청한 것도 같았다. 모 대기업도 자칫 나중에 화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직접 송금은 피하고 협회를 통해 지원하는 형식이라도 갖춰야 한다는 내부 목소리도 나왔을 법 하다. 그러나 모 대기업은 결국 직접 송금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이 강압을 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이 그룹의 오너는 전 국민이 보는 가운데 28년 만의 재벌 청문회에 불려 나와 하루 종일 집중 포화를 당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모 대기업의 임직원들이 회장님을 잘 모셨다고 하긴 힘들어 보인다.

언제든지 잘릴 수 있는 직장인들에게 회장님은 어렵고 지엄한 존재다. 삼강오륜과 장유유서를 핵심으로 하는 유교 사상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한국에서 윗사람을 보필하는 방법은 ‘무조건 충성’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법 위의 충성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시대가 됐다. 더구나 정경유착은 구시대적 산물이다. 이번 사태에서 보듯 맹목적 충성은 회장님을 오히려 더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아닐 땐 아니라고 하는 임원이 많은 기업이 길게 보면 더 잘 된다. 충성보단 준법이고, 꼼수보다는 정도(正道)다.

윗사람이 그룹 총수 일가라면 더 더욱 그렇다. 10주째 이어진 1,000만명(누적)의 촛불에도 여전히 잘못한 게 손톱만큼도 없다는 박 대통령의 어이 없는 궤변을 들으며 자기만의 구중궁궐 속에 갇혀 무엇이 잘못인 줄도 모른 채 한평생을 사는 이가 과연 박 대통령 한 명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재벌가 중에도 세상 물정 하나 모르고 살다 가끔 ‘갑질’을 부려 신문 사회면에 나는 이들이 없지 않다. 그들이 자기만의 세상에서 나와 진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많은 기회를 만드는 게 진정 이들을 돕는 일이다.

한국 경제가 어렵다. 회장님들의 기업가 정신이 아쉬운 때다. 회장님들이 마음껏 뛸 수 있도록 ‘제대로’ 모시는 임직원이 많은 정유년 한국 재계를 기대한다. 박일근 산업부장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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