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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당신들만의 민주주의

입력
2017.03.0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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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정’(2월2일 CBS인터뷰), ‘선한 의지론’ (2월19일 부산대학교 강연), “자유한국당이나 민주당이나 별 차이가 안 난다”(2월22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 “이승만도 박정희도 모두가 대한민국”(3월1일 삼일절 논평) 자유한국당을 포함한 대연정 불가피(3월2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 안희정은 가다듬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더 다듬을 필요가 없는 완제품이다.

안희정은 ‘자유한국당이나 민주당이나 아무 차이가 없다’는 발언을 하면서 폭탄을 터뜨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987년 혹은 1990년 이래로 저 폭탄은 조금씩 녹슬어간 끝에, 지금은 아무도 놀라지 않는 ‘공갈 폭탄’이 되었다. 뇌관도 없는 폭탄에 놀라는 척하는 사람들은 자칭 ‘깨시민(깨어 있는 시민)’이거나 아직도 자신들이 진보 좌파라는 환상 속에 사는 ‘노사모’뿐으로, 정작 놀라운 것은 ‘프로 레슬링은 쇼다’(장영철)와 같은 천기누설에 있지 않다.

경악할 것은 안희정이 도널드 트럼프를 아들처럼 빼어 닮았다는 점이다. 지난 2월5일 트럼프는 폭스뉴스와 회견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밝혔다. 진행자 빌 오라일리가 “푸틴은 살인자”라고 반박하자,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우리도 많은 살인자가 있다. 미국은 결백하다고 생각하느냐?” 이것은 폭로도 진실도 아니다. 미국이 온갖 전쟁과 수상쩍은 비밀 작전을 통해 제3세계 민중을 공공연히 살해해 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세계인들은 미국이 이전과는 다른 지도력을 발휘해 주기를 바라지, ‘미국에도 살인자가 많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라는 외침이 특출 난 진실이 될 수 없듯이, ‘미국도 결백하지 않다’라는 공표만으로는 진실이 될 수 없다. 진실은 창안과 선택을 필요로 한다.

트럼프는 또 지난 1월25일 국토안보부 방문 시 행한 인터뷰에서 “IS가 중세 이후 누구도 듣지 못했던 짓을 하는데, 내가 ‘워터 보딩’(water boardingㆍ물고문)에 끌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미국이 여태껏 몰래 해왔던 게 분명한 중세 적 물고문을 합법화하겠다는 결정에는 어떠한 창안도 선택도 없다. 그가 멕시코 국경에 세우겠다는 장벽 역시 미국이 오래 전부터 여러 형태로 시행해 왔던 것이다. 아마도 트럼프는 대통령 재임 동안 아무것도 창안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한국당이나 민주당이나 아무 차이 없다, 그러니까 대연정’이라는 안희정도 마찬가지다. 트럼프의 ‘미국=러시아’ 또는 ‘IS=미국’과 안희정의 ‘자유한국당=민주당’ 또는 ‘좌파=우파’라는 발상은 나태하고 무책임하며 비윤리적이다.

타리크 알리의 ‘극단적 중도파’(오월의 봄, 2017)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공산주의 이상이나 사회주의 해법만 사라진 게 아니라, 좌파와 우파의 차이마저 증발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좌파는 표와 권력을 얻기 위해 사회민주주의 정책과 이상을 팽개치고 자본 친화적이 되어 간다. 알리의 책과 거의 동시에 출판된 장신기의 ’진보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시대의창, 2017) 역시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이명박근혜’의 신자유주의가 시대적 대세가 되면서 진보는 표를 얻기 위해 우파 신자유주의의 기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검토하고 거기에 동화되어 갔다. 안희정은 문재인보다 젊기 때문에 미래의 표를 입도선매한다는 생각에서 계산된 폭탄을 거듭 터뜨리고 있겠지만, 실은 민주당 전체가 극단적 중도다.

나는 작년 어느 시사 주간지에 “지난 4월 총선에 처음으로 투표를 하지 않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앞으로 영영 투표에 참여하지 않겠다”라고 썼다. 2013년 9월4일, 국회의원 289명이 투표한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은 찬성 258표로 가결됐다. 사실 안희정이 말하는 대연정은 그때 이미 성공적 시험가동을 마쳤다. 통진당에 투표할 수 없어서 투표장에 가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통진당에 표를 준 적이 없다!). 니코틴 없는 담배, 알코올 없는 맥주, 카페인 없는 커피를 사절한다. 당신들만의 민주주의, 당신들끼리 누려라.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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