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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이남자가 사는 법-남극점 도전 산악인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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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이남자가 사는 법-남극점 도전 산악인 박영석

입력
2003.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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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기온 섭씨 영하 55도, 원정 거리 1,200㎞, 원정기간 최소 60일, 그러나 장담하기 어려운 날들, 각종 식량과 장비를 실은 썰매 무게 150㎏…. 남극점 원정에 나서는 산악인 박영석(40)씨가 계획을 설명하며 담담하게 풀어놓는 수치들이다. 모두 그가 뛰어넘어야할 벽이다.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등정, 지구 3극점 정복을 일컫는 ‘산악 그랜드 슬램(Park’s Grand Slam)’. 산악인 박영석씨는 이 전대미문의 기록에 북극과 남극 정복만을 남겨두고 있다. 7명의 원정대와 함께 31일 뉴질랜드 오클랜드로 출발하는 ‘국가대표 산악인’ 박영석씨를 만났다. 그는 탐험대장으로 칠레 산티아고와 푼타아레나스 등을 거쳐 스키를 신고 남극점으로 향한다. 원정대장은 LG화재 구자준 사장.

"산을 오르는 이유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공부가 하기 싫어 대학은 죽어도 안 가겠다고 버티던 고등학생 시절, 그는 당시 우연히 마주친 동국대 산악부의 ‘마나슬루 등정’ 환영행렬을 넋잃고 바라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한다. “퍼레이드를 보는 순간 ‘바로 저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면이 그랬냐고 묻지 마십시오. 이유도 없는 막연한 느낌이었지만 ‘저것이 내 인생이다’라는 확신 만큼은 너무도 선명했으니까요.”

그는 ‘왜’라는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많이 들으셨던 질문일 것 같은데…”라고 말을 꺼내기 무섭게 “왜 산을 오르냐고는 제발 묻지 마십시오”라는 답이 돌아온다. 나이 예순 넘어 인생의 황혼을 바라볼 때쯤이면 누구처럼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오른다’ 같은 멋진 말을 읊을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에게 산은 삶 그 자체다 이유를 따지는 것 자체가 호들갑스럽다는 얘기다.

“밥을 왜 먹습니까? 숨은 왜 쉬죠? 아침마다 세수는 왜 하는지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저에게 산은 그런 겁니다.”

동국대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해 산악부에 들면서 시작된 박씨의 등반ㆍ등정 기록 리스트는 A4지 두 장을 가득 채운다. 히말라야 14좌 8년2개월만에 완등, 1997년 한해 동안 8000m대 산을 무려 여섯 개나 올라 ‘히말라야 최단기간 최다등정’ 세계기록 획득,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언뜻 봐도 경이로운 기록이 줄줄이 나열돼 있다. 이번에 남극점 원정에 성공하면 인류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램 달성까지는 북극점만 남겨두게 된다.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 없어

수많은 탐험의 경험 중에도 지난 4월 시도했던 북극점 원정은 가장 힘겨웠던 도전으로 기억된다. 돌아오는 항공편 조달 문제로 극점 정복을 10여일 남겨둔 지점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아쉬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산에서는 경험치 못한 많은 돌발변수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했다.

“영하 40도에 달하는 추위로 관절은 물론 눈과 입이 얼어 붙었습니다. 눈을 함부로 뜨고 다니다가는 설맹(雪盲) 현상으로 삼사일 동안 앞이 깜깜해지기 일쑤였죠. 말로만 듣던 북극곰이나 격렬한 눈보라…. 대원들의 몸과 마음은 점점 피폐해지고 갈라진 얼음 사이로 올라온 차갑고 하얀 김은 가지 말라고 길을 막아서는 것 같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얼음이 물 위를 떠다니는 북극의 구조 때문에 20㎞를 전진해도 오히려 10㎞ 이상 뒤밀리는 하는 허탈한 상황도 이어졌습니다.”

결국 실패하긴 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이유가 외부에 있었기에 결코 후회는 없다고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북극점보다는 수월하다고 여겨지는 남극점부터 정복한 후 2005년쯤 ‘마지막 관문’에 다시 도전할 생각이다.

“최선을 다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봤는데도 안 된다면 그건 자연이 오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북극에서도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거죠.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산을 올랐다 해도 스스로 쉬운 길을 택한다거나 100%를 걸지 않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자신?대한 질책과 후회로 못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그는 ‘한 수 배우게 해주는’ 실패한 등반도 소중히 여긴다. 언론에서는 그의 기록과 성공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히말라야 14좌에 31번 도전하면서 그는 13번의 실패를 겪었다.

"한번 타협하면 영원히 기회는 오지 않는다"

박영석씨가 산에 오를 때마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쯤에서’ ‘여기까지’ 같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타협이다.

“일단 산에 올라서면 ‘내 안의 나’가 끊임없는 유혹의 목소리를 냅니다. 관중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어렵게 나아갈 필요가 있느냐는 식이죠. 예를 들어 하루 12시간을 걸어야 할 때 7~8시간만 가고 쉬고 싶다거나, 바람이 강하니 오늘은 쉬는 게 어떨까 하는…. 하지만 7~8시간만 가자고 타협하면 매일 그 정도밖에 가지 못하게 됩니다. 자연이 기회를 열어줄 때 전진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기 때문이죠.”

일단 자신의 벽을 넘어서면 죽음의 공포는 멀리 사라진다. 20일 출간한 자전 에세이 ‘끝없는 도전(김영사)’. 그는 책에서 “목숨을 건 위험한 등반 속에서 나는 삶을 생각하고 신의 존재와 인간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고 술회했다.

“이제 산에서 시체를 보아도 놀라지 않습니다. 저도 20년 동안 일곱 명의 동료를 산에서 잃어야 했어요. 하지만 신의 존재와 대자연의 순리를 믿기 시작하면 죽음은 결코 두려운 현상이 아닙니다. 만약 제가 오늘 밤 죽을 운명이라면 침대에서 떨어져도 죽을 겁니다. 죽음은 인간이 무서워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20일 가진 발대식 겸 출판기념회에서 “글을 읽는 청소년들에게 ‘험준한 산을 오르는 것처럼 겸손하고 끈기있게 삶을 산다면 어떤 고난도 씩씩하게 헤쳐나갈 수 있다’는 꿈과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한 박씨. 그는 마지막으로 청소년들에게 “꿈이 있다면 그것을 향해 열번이고 백번이고 도전, 인생의 주인공이 되라”며 “1%의 가능성만 있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김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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