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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일 천막농성 해고자에게 ‘꿀잠’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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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일 천막농성 해고자에게 ‘꿀잠’이 생겼다

입력
2017.08.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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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동에 첫 비정규직 쉼터 개소

부당해고 맞서 상경투쟁 윤광채씨

“불안감 없이 맘껏 씻고 자니 좋아”

거리서 싸우는 노동자 임시숙소

쌍용차ㆍ콜트콜텍 투쟁 7명 머물러

19일 문을 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사진작가 정택용씨 제공
19일 문을 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사진작가 정택용씨 제공

강원 삼척 출신 동양시멘트 비정규직(사내하청) 해고노동자 윤광채(57)씨는 서울생활 2년을 길거리에서 잤다. 복직 소송을 진행하며 서울 종로구 수송동 리마빌딩 본사 앞에 차린 작은 농성천막 속에서다. 구청이 이달 초 그 천막을 철거하면서 이후 금속노조 사무실 바닥에서 밤을 보냈다.

그런 윤씨에게 집이 생겼다. 그것도 4층 건물의 알록달록한 창문 색이 예쁜, 꽤 좋은 집이다. 새 집에서 첫 밤을 보낸 윤씨는 20일 “조용히 잠만 잤을 뿐인데도 자는 내내 누군가가 꼭 안아주는 것처럼 편안했다”고 말했다. 그는 “‘쫓겨나지는 않을까’ 불안함 없이 마음껏 씻을 수 있었던 점도 좋았다”고 말했다.

그를 품어준 곳은 19일 오후 서울 신길동에 문을 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각계의 십시일반으로 건립기금 7억6,000만원을 모아 마련한 ‘기적’이다. 5명이 한 번에 샤워를 할 수 있는 세면실, 거리 농성을 하다 더러워진 옷을 빨 수 있는 세탁실이 마련돼 있고, 조리를 할 수 있는 식당 겸 카페에는 어느 후원자가 보내준 쌀도 준비돼 있다. 4층에 13~20명이 숙박 가능한 침소가 있는데, 2ㆍ3층도 조만간 쉼터를 조성해 수용 인원을 늘릴 계획이다.

윤씨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포근한 이불을 덮고 자고, 샤워를 할 수 있고, 옷을 빨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꿈만 같다.

지난해 8월 서울 수송동 리마빌딩 앞 동양시멘트 해고노동자 농성장. 장재진 기자
지난해 8월 서울 수송동 리마빌딩 앞 동양시멘트 해고노동자 농성장. 장재진 기자

그가 10명 가량의 동료들과 풍찬 노숙을 한 것은 730일. 보도블럭 위 천막에 살면서 여름에는 지독한 폭염을, 겨울에는 매서운 한파를 견뎌야 했다. 인근 공원화장실에서 더러워진 옷을 ‘도둑 빨래’ 했고, 페트병을 바가지 삼아 몸을 씻었다. 대로변에서 밤을 지새우느라 24시간 차량소음에 시달린 탓에 숙면은 포기했다.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근로자지위 확인소송에서 지난해 12월 1심 승소했음에도 복직조건에 대한 노사 간 이견으로 여전히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비정규직들에게 잦은 부당해고 사건은 소송을 거치면서 수년이 걸리고 그 사이 이들은 거리를 떠도는 경우가 많다. 꿀잠 개소와 함께 윤씨를 비롯한 기아차, 쌍용차, 콜트콜텍 등의 노동자 7명이 첫 밤을 보냈다. 3,853일째 복직 농성을 하고 있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김경봉(58)씨는 “주택가라 소음으로부터 완전 해방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꿀잠 공사에 직접 참여했으며, “집안 곳곳이 손길이 묻은 곳이라 의미가 남다르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꿀잠 내부에는 5명이 동시에 씻을 수 있는 세면실이 마련돼 있다. 장재진 기자
꿀잠 내부에는 5명이 동시에 씻을 수 있는 세면실이 마련돼 있다. 장재진 기자

‘꿀잠’이 잠을 자는 공간만은 아니다. 2015년 시작된 ‘꿀잠 프로젝트’는 부당해고를 당해 회사와 다투고 있거나,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적은 월급을 받는 등의 비정규직 문제가 첨예해지면서 이들이 문을 두드릴 곳이 필요하다는 각계의 뜻이 모여 출발했다. 노동권을 침해 받은 사람들이 상담을 청하고 위로 받을 수 있는 곳. 생활 기반이 지방에 있어 서울에서 농성을 해야 할 때 돈 걱정 없이 쉬다가 잠을 청할 수 있는 곳. 그 잠이 달콤하길 바라기에 집의 이름도 꿀잠으로 정했다.

19일 꿀잠의 첫 입소자로 선정된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김경봉씨가 4층 쉼터에서 침구류를 살펴보고 있다. 장재진 기자
19일 꿀잠의 첫 입소자로 선정된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김경봉씨가 4층 쉼터에서 침구류를 살펴보고 있다. 장재진 기자

사단법인이 설립되고 신길동의 한 다세대주택을 사들여 지난 4월 24일 건물 부분 철거와 리모델링을 시작하는 첫 삽을 떴다(본보 4월 25일자 15면). 리모델링 작업에는 1,0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했다. 노동운동 관련 전시를 할 수 있는 문화공간, 옥상 정원, 상담 및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지하강당도 갖췄다. 상근자 2명이 운영을 맡는다.

비정규직과 해고 노동자, 비정규직 운동 활동가들은 무료 이용가능하고, 그 외에는 소정의 기금을 내는 식으로 운영된다. 일정 기간 숙식을 원한다면 홈페이지(http://www.cool-jam.kr)나 전화(02-856-0611)를 통해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조현철 사단법인 꿀잠 이사장은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이 올 때까지 꿀잠이 ‘여름방학 외갓집’처럼 포근한 쉼터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부지 매입과 공사 비용 부족분을 마련하기 위해 3억원 가량의 대출을 받은 상태라 앞으로도 후원이 필요하다. 법률 상담을 위해 변호사 등의 재능기부도 필요하다. ‘꿀잠 프로젝트’는 아직 완성이 아니며, 여전히 진행 중인 셈이다.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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