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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묵언이 필요할 때'

입력
2017.03.3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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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를 책임졌던 사람은 어떤 위기가 닥치더라도 여유와 유머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 문재인 진영에 막말을 퍼부으며 우파진영의 대동단결을 주장해온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엊그제 영장실질심사를 기다리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던진 충고다. 근데 사례로 든 일화가 엉뚱하다. '언젠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골프장에서 버디를 한 후 캐디에게 팁 1만원을 주면서 '이제 내 전 재산은 26만원'이라고 농담했다는 풍문'을 소개한 것이다. 좋게 이해하려고 해도 납득하기 어렵다.

▦ 사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29만원으로 더 유명하다. 그는 1997년 비자금 사건 최종심에서 2,205억원을 추징당했지만 돈이 없다고 버티며 납부를 미뤘다. 이에 법원은 2003년 그의 재산목록을 확인하는 심문을 열었는데 이때 그는 "나의 전 재산은 (다 압류당해) 통장에 들어있는 29만원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 측은 얘기가 와전됐다고 해명했지만 이후 '전두환=29만원'이라는 등식은 내내 그를, 혹은 권력의 치부를 비꼬는 소재로 인용됐다. 앞의 26만원과 이 29만원이 어떤 관계인지는 몰라도 골프장 일화는 또 하나의 추문일 뿐 유머가 될 수 없다.

▦ 참 묘하다. 이런 즈음에 전두환씨 부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회고록을 내놓으니 말이다. 전씨는 책에서 자신과 박근혜, 박근혜와 최태민, 나아가 최순실의 오랜 인연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관음증만 키웠을 뿐, 어느 것 하나 재미나 흥미를 돋우지 않는다. 더구나 이 시점에 이순자씨는 "우리도 5ㆍ18의 억울한 희생자"라고 목소리 높였다. 그녀가 한때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다 '홀로 그를 남길 수 없어' 생각을 바꿨다는 남편은 박근혜의 꿈을 말렸다고 했다. 뭔가 뒤죽박죽이다.

▦ 2017년 3월 마지막 날에 뒤돌아보니 우리 모두 국가 지도자 탄핵과 구속을 감내해야 하는 고되고 힘든 시절을 지나왔다는 생각이다. '빛으로 쓴 편지'라는 사진 칼럼으로 깊은 울림을 던져온 후배가 때마침 '묵언(默言)이 필요할 때'라는 작품을 내놨다(한국일보 30일자 29면). 남양주 운길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종사에서 바라본 그림 같은 능선에 '무릇 사람은 이 세상에 날 때 입 안에 도끼를 간직하고 나와서는 스스로 제 몸을 찍게 되니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뱉은 악한 말 때문이다'는 법구경 팻말을 얹었다. 침묵이 없으면 아우성도 힘을 잃는 법이다. 이 침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방관이 아니라 '말을 참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리고 성찰하는' 행동이다.

이유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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