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는 못 본 척… 패터슨은 응시
여전히 서로 “상대방이 범행” 주장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 심규홍) 심리로 4일 열린 아더 존 패터슨(36)의 살인 혐의 첫 공판. 1997년 ‘이태원 살인사건’ 현장에 있던 두 남자가 법정에서 만났다. 18년 만의 재회였다. 살인범으로 몰렸다가 무죄로 풀려난 에드워드 리(36)는 증인석으로 향했다. 유일한 목격자인 그는 진범으로 기소된 옛 친구 패터슨이 눈에 들어왔지만 애써 못 본 체했다. 피고인석에 앉은 패터슨은 그를 빤히 올려다 보며 응시했다. 한때 친구였던 둘의 달라진 상황은 리의 말끔한 정장 차림과 패터슨의 하늘색 수의가 대변했다.
리는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난 패터슨이 피해자를 칼로 찌르는 것을 봤다.” 그는 현장에 둘만 있어서 둘 중 한 사람이 조중필(당시 22세)씨를 흉기로 찔렀다고 진술했던 사실을 인정하면서 재차 패터슨이 진범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사건의 구체적 상황을 묻는 검사의 질문에 대부분 “기억이 안 난다”고 답했다. 화장실에서 조씨를 봤을 때의 모습과 사용된 흉기인 ‘잭 나이프’ 등도 머릿속에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재판장은 검찰에게 “당시 본 것이 무엇인지 물어서 끌어내야 될 것 같다”고 주문하기까지 했다. 이후 검찰이 당시 봤던 것을 말해달라고 하자 리는 기억을 되살려 내기도 했다. 그는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고, 세면대 위 거울을 통해 패터슨이 대변기 칸을 살펴보고는 갑자기 조씨를 찌르기 시작하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리는 이어 “조씨가 오른쪽 손으로 패터슨을 치려 했지만 패터슨은 계속 피해자를 찔렀다”며 “조씨가 자신의 목을 잡으며 쓰러지려는 것을 보고 화장실을 나왔다”고 진술했다. 검사가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다그치자 리는 잠시 당황하며 “그때 당시 패터슨은 친구였고, 난 너무 놀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답했다. 패터슨은 불리한 증언이 나올 때면 3m 가량 떨어진 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둘은 이날 법정에서 상대방의 범행 장면을 재연하기도 했다. 리는 세면기로 가정한 증인석 옆에 패터슨 대역으로 검사를 세우고 패터슨의 범행 위치를 설명했다. 패터슨도 “리가 ‘뭔가 보여줄 게 있다’고 해 난 세면기 옆에 서 있다가 리가 흉기로 찌르는 것을 봤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리는 “진실을 말하고 (유족에게) 사과하라”고 패터슨을 압박했고, “리가 기억을 못해 질문할 것도 없다”던 패터슨도 “18년 전 일을 거의 기억 못하면서 내가 조씨를 똑바로 쳐다봤다는 건 어떻게 기억하냐”며 응수했다.
리는 이날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며 ‘증인지원’절차를 통해 법원 별도 통로로 입장하는 등 재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검찰 공소장에 리는 살인을 부추긴 공범으로 적시돼 있다.
패터슨과 리는 조씨가 살해된 1997년 4월 이태원 햄버거가게 화장실에 있었다. 둘은 “제3자는 없었다”면서도 서로를 살인범으로 지목해 처음에는 리가 범인으로 기소됐으나 무죄가 확정됐다.
손현성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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