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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실과의 러브스토리… 이란은 ‘형제의 나라’였나

입력
2016.05.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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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는 지금도 왕궁을 떠받혔던 기둥과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옛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는 지금도 왕궁을 떠받혔던 기둥과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옛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는 낙서도 역사가 되는 곳이었다. 높이 10㎝의 돌계단 111개를 올라 12m 높이의 대지 12만8,000㎡에 폐허로 남아있는 페르세폴리스를 오르니 가장 먼저 사람 얼굴에 짐승 몸을 가진 수인상과 목우상이 이방인을 맞는다. ‘만국의 문’이다. 2,400여 년 전부터 수많은 사신과 병사들이 오간 이 문에는 ‘WILLOCK’ ‘1810’등 낙서가 어지럽다. 1810년 이 곳을 다녀간 윌록도 이 도시와 함께 벌써 200여 년의 나이를 먹고 있었다. 몰지각한 낙서도 공소시효를 지나면서 페르세폴리스와 한 몸이 됐다.

페르세폴리스로 가는 길은 멀었다. 인천에서 두바이, 그리고 테헤란에서 쉬라즈로 비행기를 타고 내려가 다시 동쪽으로 75㎞를 달려야 했다. 그리스어로 ‘페르시아의 도시’인 이곳은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1세 때 착공, 손자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기원전 469년쯤 완성했다. 그러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에 의해 잿더미가 된 곳이다.

야트막한 라흐마트산에 올라 아파다나궁전과 백주궁전, 보물창고의 옛 흔적을 내려다보며 눈을 감아본다. 세계를 호령하던 옛 페르시아제국의 수도가 그려지다 말다를 반복한다. 가난한 상상력 탓이다. 이곳에서 으뜸가는 유적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아파다나궁전 계단에 새겨진 ‘조공행렬도’ 부조다. 앗시리아 사신들은 양을 끌고 오고, 엘람왕국은 사자, 아르메니아 사신은 말, 레바논은 금가락지, 바빌로니아는 소, 에티오피아는 상아를 진상하는 등 주변 28개국 사신들이 특산품을 페르시아 대왕에게 바치는 행렬이다. 최근 케냐 나이로비에서 밀렵꾼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상아 1만6,000여 개를 소각했다는데, 코끼리의 운명이 예나 지금이나 도긴개긴이다.

페르시아에 푹 빠져 들어갈 무렵 유적 한가운데 LG로고가 선명한 에어컨 실외기가 눈에 들어왔다. 하이얼이나 후지쓰 상표였으면 욕을 해줬을텐데, LG라서 두 눈 질끈 감았다.

이란 여행객들이 아케메네스 왕조 창시자인 키루스 대왕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다. 1월의 이란에 눈밭이 펼쳐져 있다.
이란 여행객들이 아케메네스 왕조 창시자인 키루스 대왕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다. 1월의 이란에 눈밭이 펼쳐져 있다.

이 곳에서 북서쪽으로 6㎞를 달리면 페르시아 대왕 4명의 무덤이 150m 높이의 돌산에 만들어진 낙쉐로스탐, 로마와 아랍에 대한 사산왕조의 전승 기념물인 낙쉐라자브가 있고 차량으로 1시간 거리인 파사르가드에는 아케메네스 왕조(BC 550∼BC 330) 창시자인 키루스 대왕의 무덤이 있다. ‘나는 한 때 세계를 지배했노라, 하지만 언젠가는 다른 왕이 이 땅을 점령할 것을 안다. 점령자여 그대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점령당할 것이다. 그러니 내 무덤을 덮고 있는 약간의 흙먼지를 시샘하지 말게나.’ 묘비에 남겨진 이 글 때문에 그의 묘가 멀쩡하다고 전해진다.

페르시아에 실크로드 도시가 없을 턱이 없었다. 인구 50여 만 명의 야즈드는 흙으로 된 도시였다. 7세기 아랍의 정복 후 조로아스트교도들의 피난처가 됐고, 1200년 초에는 칭기즈칸의 박해를 피해 달아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여들었으며 1272년 마르코 폴로도 이 곳을 지나쳤다.

조로아스터교의 도시 야즈드에 조장을 했던 침묵의 탑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왼쪽이 남성, 오른쪽이 여성용이다.
조로아스터교의 도시 야즈드에 조장을 했던 침묵의 탑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왼쪽이 남성, 오른쪽이 여성용이다.

전 세계 조로아스터교 신자 15만명 중 10%인 1만5,000명이 살고 있는 이 곳에는 몇 십년 전까지만해도 조장(鳥葬)의 풍습이 남아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2014년 1월 중순 이 도시 첫 답사지는 ‘침묵의 탑’이었다. 높이 70,50m의 야산 2개로 된 이곳은 바로 남녀의 장례터였다. 시신을 야산 정상 제단에 올려 놓으면 새가 와서 살을 뜯어먹는다. 영혼은 영원하지만 시신은 불결하다고 믿는 그들의 믿음 때문이다. 중국 티베트에서는 뼈도 가루로 만들어 새들에게 먹였다는데, 이곳에서는 뼈만큼은 남겨뒀다.

차량으로 5분 거리에 조로아스터교 최대 성지인 아테슈카데 사원이 나왔다. 건물 상단에 선의 신인 아후라마즈다와 그를 상징하는 새, 그리고 ‘바른 생각, 바른 행동, 바른 말’이라는 글이 페르시아어로 적혀 있었다.

한 페르시아 여인이 야즈드의 골목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이 도시에서는 미로를 걷는 재미가 있다.
한 페르시아 여인이 야즈드의 골목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이 도시에서는 미로를 걷는 재미가 있다.

조로아스터교가 배화교(拜火敎)로 불리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사원 안으로 들어가니 중앙 유리창 너머 황금색 잔에 타고 있는 불꽃을 볼 수 있었다. 470년, 그러니까 무려 1,500여 년 전 발화된 불씨를 그대로 살리고 있는 곳이었다.

또 다른 실크로드 도시 이스파한으로 달린다. 16∼18세기 사파비 왕조의 수도였던 이곳은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였다.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버스는 땅거미가 진 이 도시의 심장부로 이방인을 떨어뜨린다. ‘입수쌍조문’을 발견할 수 있었던 이맘호메이니광장이다. 길이 512m, 폭 163m의 이 광장은 한 때 폴로경기장이었다.

꽃밭과 분수대, 산책길에는 이스파한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야경을 즐기고 있었고 동서남북 4면의 기념품 가게에서는 시계와 가방, 히잡, 전통 문양의 동판, 열쇠고리, 양탄자 등을 팔고 있었다. 충동구매는 내 장점이자 단점이다. 알아볼 수도 없는 페르시아 숫자의 벽시계와 수제로 문양을 새긴 동판을 뚝딱 샀는데 귀국길 짐싸는데 혼났다. 그래도 이 시계는 우리 집 벽에 걸려 지금도 잘 돌아가고 있다.

이스파한의 옛 카라반 숙소였던 압바스호텔 로비에서 이란 여성들이 신라왕관 모형을 쳐다보고 있다.
이스파한의 옛 카라반 숙소였던 압바스호텔 로비에서 이란 여성들이 신라왕관 모형을 쳐다보고 있다.

숙소는 운 좋게도 과거 카라반 숙소로 사용됐던 압바스호텔이었다. 마구간 수준이 아니라 현대식으로 단장된 최고급 호텔이었다. 호텔 로비에는 2013년 실크로드 우호협력 행사를 했을 때 경주시가 선물한 신라금관도 있었고, 뒤편 공원에는 실크로드 우호협력기념비도 세워져 있었다.

1935년 국호가 이란으로 바뀐 페르시아와 신라의 문명교류를 얘기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한 권의 책이 있다. 쿠쉬의 책이란 뜻의 ‘쿠쉬나메’다. 페르시아의 서사시로 오랜 세월 구전되다 1108∼1111년 쓰여졌다. 1만129절이나 되는 이 책에는 신라에 관한 내용이 절반이나 된다. 아랍의 공격을 받던 사산조페르시아의 왕자 아브틴은 중국을 거쳐 신라 왕 타이후르에게 몸을 의탁한다. 바실라, 실라로 표기된 이 나라에서 아브틴은 타이후르의 딸인 파라랑 공주를 연모, 아내로 맞게 된다. 제국을 되찾기 위해 귀국한 아브틴은 정적의 손에 숨을 거두지만 파라랑과 아브틴의 아들, 페레이둔은 아버지 원수도 갚고 제국도 되찾게 된다. 그 후 신라와 페르시아의 우정은 계속됐다는 내용이다.

한동안 단절됐던 우리나라와 이란과의 관계도 이제 해빙기를 맞고 있다. 경주와 이스파한이 만나고, 서울과 테헤란이 의기투합했다. 실크로드는 현재진행형이다.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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