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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저녁을 찾아서] “일·가정 양립에 쏟는 비용은 낭비 아닌 미래 위한 투자”

입력
2017.06.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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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시간제 노동자 확산 협약

다양한 파트타임 가능하게 길 터줘

한국 새정부, 사회 전반 신뢰 구축을

젊은 세대의 생각 적극 반영해야

네덜란드가 ‘파트타임의 나라’라 불리며 일과 가정의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토대는 35년 전 바세나르협약(Wassenaar Agreement)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세나르협약은 1982년 헤이그 북쪽 작은 마을 바세나르에서 네덜란드 사용자협회와 노동총연맹이 맺은 시간제 노동자 확산을 위한 협약으로, 흔히 현대 노동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일컬어진다. 다양한 파트타임 근무가 가능하도록 길을 터 준 덕분에 네덜란드는 협약 당시 50%였던 고용률을 2006년 68%로 끌어올리며 위기를 타개하고 재도약했다.

당시 노동계 대표로 협약을 이끌었던 빔 콕 전 네덜란드 총리를 지난달 16일 암스테르담에서 만났다. 그는 “일ㆍ가정의 양립을 위한 지출은 돈 낭비가 아닌 미래를 위한 투자”라며 “투명한 노사정 협약을 통해 노동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국가를 전반적으로 성숙시키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동운동가 출신의 빔 콕 전 총리는 협약을 맺은 뒤 1986년 정계에 입문, 노동당 당수, 재무장관, 부총리를 거쳐, 총리(1994~2002년)를 지냈다.

2017-06-22(한국일보)
2017-06-22(한국일보)

-바세나르협약을 추진할 당시 네덜란드 상황은 어땠나.

“1980년대 초 두 차례 석유파동으로 세계 경제가 들썩였고,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꿈을 실현하는 게 아예 불가능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였다. 국민 대부분이 실업의 직간접적 희생자였다. 네덜란드 위기를 타개할 획기적 해법이 절실하게 요구되던 때였다.”(당시 네덜란드 정부는 연금과 최저임금을 올려 내수 부양을 시도했으나 재정 악화 및 수출경쟁력 약화로 경제난이 더 심각해지는 악순환에 빠졌고, 이를 네덜란드병이라 불렀다.)

윌렘 빔 콕 전 네덜란드 총리가 지난달 16일(현지시간) 암스테르담에서 가진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바세나르 협약이 네덜란드 사회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고 있다.
윌렘 빔 콕 전 네덜란드 총리가 지난달 16일(현지시간) 암스테르담에서 가진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바세나르 협약이 네덜란드 사회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고 있다.

-난관을 극복하고 바세나르협약이 타결된 비결은 무엇인가.

“물론 난관이 많았다. 사용자 측은 임금을 동결한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이나 일자리를 보장하는 계획에 선뜻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노동자는 기업 이윤이 늘어나는데 왜 임금 인상을 희생해야 하느냐는 반감과 불신이 컸다. 협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는 2차 세계대전 후인 1950년 국가재건을 목표로 사회경제위원회(SER)를 만들었다. 노동자 대표 15명, 사용자 대표 15명, 각계 전문가 15명이 참여해 갈등이 발생하기 전 대화로 해법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갖가지 사회·경제적 주제를 다양한 시각으로 논의하고 정부에 권고했다. 노사정은 서로 다른 입장을 조율하는 방법을 배워갔다. 바세나르협약도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세나르 협약 심볼
바세나르 협약 심볼

-바세나르협약이 네덜란드에 남긴 성과는.

“노조 측은 임금인상 요구 자제, 사용자 측은 노동시간 5%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정부는 기업의 세금 부담 완화와 공무원연금 축소 등 각자 역할을 해 경제위기 극복에 이바지했다. 단지 이것만이 아니다. 사용자 측이 노사 파트너십이 결국 기업 이윤에 긍정적 효과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 중요한 성과였다. 이후 사업 방향을 결정하고 경제위기를 돌파하는 데에 노동자들과 투명한 대화를 시도하게 됐다. 이른바 네덜란드 식 ‘폴더(Polderㆍ간척지) 모델’(바다를 간척할 때 토론과 협업을 통해 해답을 찾는 데에서 유래한 사회적 협의 모델)이다. 협약이 성사되기까지 다양한 아이디어, 가치관이 소통되었는데, 이를 통해 네덜란드가 새로운 에너지와 원동력을 얻고 경제난을 타개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성숙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한 단계 상승했다.”

-한국은 세계 최장 시간 노동하며 일과 가정의 불균형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북서 유럽과 북미 사회에서 직업의 적합성과 안정성, 직장 내 안전,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기본 조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2차 대전 전부터였다. 한 예로 1970년대 이전부터 주 40시간 근로제를 도입하며 하루 8시간 노동, 8시간 수면, 8시간의 자유시간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웠다. 사회경제위원회에서 더 좋은 답을 찾기 위해 꾸준히 토론했다. 한국도 우선 안정적인 사회보장 제도와 사회 구성원들의 동의가 깔려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들어가는 재정을 결코 돈 낭비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한국의 미래에 놀라운 성과를 가져다 줄 가치 있는 투자로 봐야 한다.”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협의를 시도했으나 종종 협상 테이블 자체가 깨지곤 했다.

“아무리 폴더 모델이 좋아도 참고 사례일 뿐 한국에 맞는 대화법이 필요하다. 특히 한국 정부와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의 생각을 적극 반영해야 한다. 이들은 부모 세대와 비교해 정치ㆍ경제ㆍ사회 이슈에 대해 정보가 많고 고등 교육도 받았다. 때문에 그들이 직면한 문제, 그에 대한 태도와 행동이 부모 세대와 다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미래를 짊어질 그들과 함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한국의 새 정부가 노동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있어 조언을 해 준다면?

“네덜란드가 그러했듯 한국도 지금의 위기가 사회의 성숙도를 높일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다. 새 정부는 인기에 영합하기보다 사회 전반의 신뢰 구축에 초점을 맞추길 바란다. 바세나르협약도 인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큰 그림이었다. 이해 당사자 모두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전 과정을 최대한 투명하게 소통했고, 그 덕분에 성과를 냈다. 솔직하게,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 대화가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지금 한국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사회적 성숙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암스테르담=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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