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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재칼럼] 공론조사, 시민의 길을 열다

입력
2017.10.16 17: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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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가보지 않은 ‘숙의 민주주의’ 실험

‘국민 표본’ 시민참여단 뜨거운 열기 감동

결과 승복해야 갈등공화국 족쇄서 벗어나

신고리 5ㆍ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이 15일 오후 충남 천안 교보생명연수원에서 열린 2박3일간 합숙 종합 토론회를 마친 뒤 폐회식을 하고 있다.
신고리 5ㆍ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이 15일 오후 충남 천안 교보생명연수원에서 열린 2박3일간 합숙 종합 토론회를 마친 뒤 폐회식을 하고 있다.

공론조사의 대표적 예가 1996년 미국 텍사스주의 발전소 건립 문제다. 발전설비 선택과 비용조달 방안을 시민 대표들이 결정하도록 했는데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환경보존에는 바람직하나 비용이 많이 드는 재생에너지 발전을 선택한 것. 이들은 재생에너지 지원을 위해 기꺼이 세금을 내기로 용단을 내렸다. 시민들에게 사회적 논란이 되는 정책결정을 맡기자 토론과 학습을 통해 스스로 난제를 해결한 것이다.

신고리 원전 5ㆍ6호기 건설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시민참여단 조사가 끝나 최종 권고안 제출만 남았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찬반 결론에 쏠려 있지만 그 이상으로 이번 공론조사 시행에 의미를 둬야 한다고 본다. 우리 사회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걸은 역사적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말 국무회의는 신고리 5ㆍ6호기 건설 임시중단을 결정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 실천 차원이었다. 그러나 원전 지지세력과 반대세력 간의 갈등이 커지자 시민들에게 결정을 맡기겠다고 선언해 나온 것이 공론조사다. 전 국민 대상 여론조사에서 나온 것과 동일한 비율로 지역별ㆍ성별ㆍ계층별ㆍ세대별 기준으로 500명을 시민참여단으로 선정했다. 전 국민을 그대로 축소시킨 표본인 셈이다.

20대 청년부터 70대 노인까지 합숙에 참여한 시민참여단 471명은 자료집을 공부하고 찬반 양측의 발표를 듣고 질의응답과 토론을 벌였다. 공론화위원회 관계자들은 시민참여단의 뜨거운 열기에 감동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합숙토론을 마친 참석자들도 “대화를 통해 많은 걸 배웠고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시민참여단에 처음부터 제기된 의문은 국가 중대사를 비전문가에게 맡겨도 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전 문제만큼 서로 다른 차원의 가치들이 혼재된 이슈는 흔치 않다. 좁은 의미의 공학적 문제만이 아니라 시민의 안전과 환경문제, 그리고 미래세대와도 관련되는 복잡한 과제다. 대표성과 평등성, 합리성 측면에서 공론조사는 충분한 정당성을 갖췄다.

과거 국가의 중요한 정책은 거의 예외 없이 정권과 관료, 그에 동조하는 전문가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원전 건설, 4대강 사업, 한미 FTA 등 사회적 논란이 큰 정책을 결정할 때 정부는 시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권위주의로 밀어붙였다. 그로 인해 극한 대립과 투쟁의 악순환이 반복됐을 뿐 아니라 합리적 성과를 만들어 내지도 못했다.

사회적 갈등을 촉발할 만한 사안들을 결정할 때 시민들을 참여시키면 책임성이 높아지고 갈등을 완화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외국의 경우 공론조사와 시민참여단 구성이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는 추세다. 환경과 과학기술 관련 현안에서 시작됐던 것이 최근에는 헌법개정(몽골,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범죄대응(영국), 원주민 화해정책(호주) 등으로 범위를 넓혀 가고 있다.

신고리 공론화위원회를 계기로 사회적 갈등을 시민의 논의로 푸는 공론작업을 활성화할 방안을 세워야 한다. 우리보다 20년 앞서 공론조사를 제도화한 프랑스의 경우 ‘풀뿌리 민주주의법’을 제정하고 ‘공공토론위원회’라는 독립적 기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신고리 공론조사위처럼 국무총리 훈령만으로는 출범 근거가 미흡한 만큼 확실한 법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짧은 공론화위 활동과 공정성 논란 등 시행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도 개선해 더 세련된 방식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

공론조사는 지금 세계 곳곳에서 쇠퇴일로에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결함을 보완하는 ‘숙의(熟議) 민주주의’의 대표적 형태다. 공론으로 다져진 숙의 민주주의야말로 현대 민주주의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신고리 공론조사 결과는 후폭풍을 몰고 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든 숙의된 결정에 승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갈등공화국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권력은 시민에게 돌려줘야 하고 시민은 책임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어야 우리 민주주의가 한 단계 성숙한다.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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