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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 성벽서 제물 추정 인골 2구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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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 성벽서 제물 추정 인골 2구 출토

입력
2017.05.16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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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자선 터번 쓴 토우ㆍ이두 적힌 목간 나와

경주 월성 배치도
경주 월성 배치도

신라천년의 왕성인 경주 월성(月城ㆍ사적 제16호)) 성벽에서 1,500년 전쯤 제물로 묻은 것으로 보이는 인골 2구가 나왔다. 성벽 유적에서 인골이 나온 것은 국내 처음으로, 제방을 쌓거나 건물을 지을 때 사람을 주춧돌 아래에 매장하면 무너지지 않는다는 인주(人柱) 설화가 사실임을 보여주는 국내 최초의 사례여서 주목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15년 3월부터 정밀발굴조사 중인 경주 월성에 대한 중간조사결과를 16일 현장에서 공개했다. 연구소는 이번 발굴조사에서 5세기 전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서쪽 성벽의 기초층에서 하늘을 향해 똑바로 누워 있는 인골 1구와 얼굴과 팔이 이 인골을 향해 있는 또 다른 인골 1구를 발견했다.

인골의 얼굴 주변에서는 나무껍질이 부분적으로 확인됐고, 결박이나 저항의 흔적이 없고 곧게 누운 점으로 미뤄 숨진 뒤에 매장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연구소 측은 밝혔다.

인주설화는 중국 상나라(기원전 1600∼기원전 1000년) 시기에 성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쓰는 풍속이 유행했다고 전하며, 우리나라에선 '고려사'에 충혜왕 4년(1343) 인주 설화와 관련된 유언비어가 항간에 돌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인골이 출토된 서쪽 성벽은 5세기쯤 축조돼 6세기에 최종적으로 보수했고, 문이 있던 자리는 유실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와 함께 경주 월성의 북쪽 해자(垓子, 적의 침입 등을 막기 위해 성곽 등의 둘레를 감싼 도랑)에선 터번을 쓴 토우(土偶, 흙으로 빚은 사람 형상의 인형)가 나왔다. 6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토우는 허리가 잘록해 보이는 페르시아풍 옷을 입고 있으며, 현재 이란계 주민인 ‘소그드인’으로 추정했다.

또 월성 해자에선 모두 7점의 목간(木簡,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문자를 기록하던 나무 조각)이 새로 발굴됐다.

한 목간에선 '병오년(丙午年)’이라는 간지가 정확히 적혀 있어 작성 시기가 법흥왕 13년(서기 526년) 또는 진평왕 8년(586년)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목간에서는 경주가 아닌 지역 주민에게 주어진 관직인 '일벌'(一伐)과 '간지'(干支), 노동을 뜻하는 '공'(功) 자가 함께 기록돼 있었다. 연구소 측은 당시 왕경 정비 사업에 지방민이 동원됐고, 이들을 지역 유력자가 감독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뢰고'의 이두식 표현인 '백견(白遣)’이 적힌 목간, 삼국사기에는 등장하지 않는 관직명인 '전중대등(典中大等)’이라는 글자가 쓰인 목간도 나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주 월성은 제5대 파사왕 22년(101에) 축성을 시작했으며, 신라가 망한 935년까지 궁성으로 쓰였다.

월성발굴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약사업인 신라왕경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재청은 월성에서 2014년 12월 개토제를 시작으로 3개월간 시굴을 한 뒤 2015년 3월 본격적인 발굴에 돌입했다. 하지만 2025년까지 복원을 완료하겠다는 계획에 대해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문화재청은 발굴 완료시기를 단정하지 않고 무기한 진행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신라천년의 궁성으로 사용된 월성을 체계적으로 발굴, 복원하기 위해 철저한 고증과 학술발굴조사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김성웅기자 ks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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