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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1월 3일] 말(馬)의 해, 말(言)의 정화

입력
2014.01.0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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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늦잠을 깨면서 청마(靑馬) 유치환 시인을 떠올렸다. 60년 만에 푸른 말의 해를 맞았다는 우연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머리가 맑아지면서 자꾸만 어떤 신탁(神託)이나 계시 같다는 느낌이 들어 한참 그 뜻을 더듬어야 했다. 개인적으로 상실과 방황의 어두운 굴을 겨우겨우 빠져 나와서 맞은 새 아침이었다. 지난해와 가장 비슷한 심리상태였던 사춘기, 그 혼란을 넘어서던 과정의 기억에서 청마 시인의 몫은 컸다. 를 비롯한 그의 시집과 서한집 를 읽으며 시와 사랑에 눈떴던 기억이 새로웠다.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살라는 뜻일까 싶었다.

다음 순간 늘 맑고도 간절하고, 힘찼던 그의 시어에 생각이 미쳤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매달 줄 안 그는'() 등의 쉬운 말로도 그는 숱한 청춘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억지로 비틀거나 무리하게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말의 힘을 그처럼 남김 없이 보여준 시인도 드물었다. 그런 연유로 말의 해를 시작하면서 말(言)의 힘, 군더더기와 거친 세상이 묻힌 때를 씻어낸 깔끔한 말의 힘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지난해는 말의 부정적 힘에 사회가 뒤뚱거렸다. 정치적으로 과장되게 손질된 말, 특정 말에 대한 집단인식만을 고려한 일방적 꼬리표 달기 등이 정치 영역을 넘어 사회 전체로 흘러 넘쳤다. 민주화 사반세기를 넘긴 마당에 '독재' '유신' '파쇼' '귀태(鬼胎)'등의 말이 야권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런 말이 활개를 칠 수 있는 현실상황과도 애초에 아귀가 맞지 않는데도, 여야의 무한 대결 정국을 이끄는 중요한 재료가 됐다.

대통령과 총리 등 정부 최고위 인사들의 거듭된 확인에도 불구하고, 철도에 부분적 경쟁체제를 도입하려는 정부 구상에는 '철도 민영화'라는 꼬리표가 달려 사상 최장의 철도파업을 떠받쳤다. 특히 올해도 이어질 '의료 민영화' 논란은 '민영화'라는 말의 주술적 힘을 연상시킬 정도다. 전체 의료체계에서 국공립병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된다고 새삼스럽게 '민영화'를 거론하는지, 의료법인의 수익 개선을 위한 일부 규제완화가 장기적으로 '영리 병원'의 씨앗일 수는 있어도 어떻게 '의료 민영화'로 해석되는지 아리송하다. 어차피 여론에 기대에 집단이익을 밀고 가려는 주체들의 여론몰이 수단으로는 적합할지 몰라도 실체가 성근 꼬리표다.

이런 억지 과장과 꼬리표가 성행하는 사회는 건강하기 어렵다. 사회의 건강을 최종적으로 지키는 국민의식을 비틀고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말로 사회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지 못하는 한 이런 말 저런 말에 헛되이 휩쓸리고, 결과적으로 좌절감만 커진다. 현대사회에서 개인과 집단의 불행은 객관적 현실이 아니라 주관적 행복 찾기의 실패에서 비롯하는 예가 흔하다. 과장되거나 왜곡된 정치언어가 사라지는 대신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는 말이 자리잡아야 국민의식이 바로 서고, 세상이 바로 선다.

이와 함께 반드시 털어내어야 할 것이 넘치는 비속어다. 초등학교 5학년 말 서울로 전학을 온 촌놈이 가장 크게 놀랐던 것이 또래 아이들의 입에 달린 욕설이었다. 시골에서는 대개 '놈' '자식'정도이고, 아주 심할 때나 '새끼'라는 욕설이 들렸지만, 서울에서는 여기에 특정 동물이나 인간 신체의 비칭이 붙은 '×놈' '×새끼' 등이 범람했다. 요즘은 나이 어린 여학생들, 산골짜기 아이들까지 그런 비속어와 욕설에 절어 산다. 가족끼리 마구 욕설을 퍼붓는 가정이 온전하기 어렵듯, 또래집단의 욕설은 관계의 틈이 조금만 벌어져도 극단적 배제나 결별을 부른다.

말이 맑지 않고서는 정신이 맑을 수 없다. 올해는 한국사회가 무엇보다 언어 정화에 공을 들이길 빈다. 의식과 정신의 변화 없이 행복한 사회는 영원한 신기루일 뿐이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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