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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丙申年 단상

입력
2016.01.0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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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되었으니 올해 운세가 어떨지 사주라도 본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사주란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일컫는 말이다. 연월일시에는 각각 두 개의 문자가 부여된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의 천간(天干)에서 한 글자,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지지(地支)에서 한 글자가 추출된다. 이 여덟 글자, 즉 사주팔자로 한 사람의 길흉화복을 설명하는 것이 사주명리이다.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를 차례대로 결합시키면 갑자부터 계해까지 총 60개의 경우의 수가 나온다. 이를 육십갑자, 또는 줄여서 육갑이라 한다. 어설프게 육십갑자를 손가락으로 짚다가 틀리는 어리숙한 행위를 비속하게 일러 “육갑 떤다”라고 한다.

서울 종로2가 점술 거리.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서울 종로2가 점술 거리.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미래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어쩌면 원초적인 욕망인지도 모르겠다. 예측은 검증과 함께 과학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사람의 길흉화복이 어찌 생년월일시로 정해지느냐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뉴턴역학도 크게 다르지 않다. 초기 조건만 정확하게 알면 적어도 원리상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결정론이 뉴턴역학의 정신이다. 결정론이 양자역학의 확률론으로 바뀐 것은 20세기 초반이다. 사주명리가 과학이 아닌 이유는 초기 조건이 육십갑자로 인코딩되는 과정, 그것이 길흉화복으로 연결되는 ‘동역학적 구조’ 등에 허점이 많기 때문이다.

미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불확실성을 최대로 줄여서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문명화된 선진사회일수록 정부 정책의 투명성이 높고 사회 시스템이 예측가능하게 돌아간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은 굳이 육갑을 짚지 않더라도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는 수단이 많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한 마음가짐과 과학적인 방법론이다. 한국은 어떤가?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는 공적 영역이 어설프게 육갑을 떤 대가가 얼마나 참혹할 수 있는지 극적으로 보여줬다. 사고가 나면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고 어느 정도의 자원이 투입돼 얼마 만에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런 ‘헬조선’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삶의 지혜는 각자도생이다.

병신년 새해는 일본과의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 소식과 함께 밝았다. 이번 협상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외교부 차관이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가 한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연휴기간 중 협상 진전이 급하게 이뤄지는 바람에 미리 말씀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송구하게 생각한다.” 대한민국 외교부는 일본을 만날 시간은 있어도 대한민국 국민을 만날 시간은 없었던 모양이다. 언젠가부터 세간에 떠돌던 “이게 나라냐?”라는 푸념을 흘려 듣지 않았더라면 정부가 국민을 저버릴 수도 있다는, 보통의 나라에서는 도저히 예측가능하지 않은 이 가능성까지 대비했을 텐데.

이런 ‘육갑 협상’을 잘한 거라고 정부는 얼마나 떠들어댈지, 그보다 더한 육갑질이 계속 되는 건 아닌지, 병신년 정초부터 마음이 무겁다.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BK사업단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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