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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언제냐고? 시골 농부에겐 모기가 없어져야 가을

입력
2015.09.1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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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바람에도 노란 논에도 시나브로 가을 정취 짙어가는데

모기에 뜨끔… 가을 아직 멀었어!

동네 어머니들이 추석을 앞두고 조생종 배를 수확하고 있다. 여느 시골처럼 삼림지역이 대부분인 구례는 지리산 자락을 타고 생산된 배가 최근 상품성을 인정받아 소비자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
동네 어머니들이 추석을 앞두고 조생종 배를 수확하고 있다. 여느 시골처럼 삼림지역이 대부분인 구례는 지리산 자락을 타고 생산된 배가 최근 상품성을 인정받아 소비자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

커피 물을 올리고 라디오를 켰다. 꽤나 달콤하고 느릿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DJ는 가을에 어울리는 곡이란다. 오토바이 덕분에 온몸으로 받는 아침바람도 가을이었다. 서시천(西施川) 둑방길 벚나무도 살짝 안색을 바꾸는 중이다. 더워서 쓰러지겠다고 어리광 부린 게 엊그제인데, 논에도 시나브로 노오란 기운이 든다.

농막의 기운도 서늘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모기향에 라이터 불을 대는데 DJ 목청이 귀에 들어온다. “초등학생 아들이 언제부터가 가을이냐고 물어요. 상식적으로는 9월부터 아닌가요 아니면 긴 소매 옷을 입을 때 부턴가요.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정하겠습니다. 짧은 문자 50원...” 별걸 다 물어봐서 정한다. 요즘 같으면 아침은 가을이고 한낮은 여름인데 오늘이 가을이냐 아니냐 따져서 어쩌자고. 무지개 색깔이 일곱 가지라고 정하고, 사람이 꽃이라고 불러야 꽃이 된다는 거만함은 어디서 나온 걸까. 정한 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몇 년 전에 아들이 물은 적이 있다. “아빠, 상식이 뭐야?”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음. 그냥 사람들이 많이 그렇게 알고 있는 거. 뭐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런 거”라고 말했다. 질문은 이어졌다. “그럼 상식적인 건 뭐야?” “응? 그거? 그냥 말이 되는 거. 정상적인 거. 당연한 거. 약속했으면 지키고 그런 거.” 똑 부러지게 대답해주지 못한 것 같아 덧붙였다. “사람이 상식은 좀 모자라도 상식적인 사람이 돼야 좋은 거지. 세상도 상식적으로 돌아가면 좋겠고.” 말이 씨가 됐을까. 아들은 상식이 많이 부족한데 창피해 하지도 않아서 간혹 당황스럽기도 하다.

장화로 갈아 신고 목장갑을 끼는 중에 모기향이 한껏 퍼졌다. 냄새가 참 좋다. 절간 대웅전 느낌도 나고 상갓집에 온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마음이 좀 차분해진다. 가만 생각하니 어색하다. 살생을 목적으로 향을 피우면서 부처님 마음을 느끼고, 곡 소리 나는 초상집을 생각하며 냄새가 좋다고 하니 말이다. 이게 상식적인가? 아니면 변태? 아무튼 이상하다.

땅콩과 대봉이 새들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새 중에도 첨병이 있어 먹을 것을 확인한 후에는 가족들을 떼로 몰고 온다.
땅콩과 대봉이 새들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새 중에도 첨병이 있어 먹을 것을 확인한 후에는 가족들을 떼로 몰고 온다.

며칠 전 서울에 다녀왔다. 대개 서울 갈 일이 그렇지만 이번에도 조문이 목적이었다. 내 나이가 그럴 때인가 보다. 아직 자식들 출가시킬 나이는 안됐으니 아무래도 검은 옷 입고 올라갈 때가 많다. 어쩔 때는 친구가 액자에 들어 앉아 혼자 웃고 있을 때도 있다.

터미널에 내려 지하철을 탔다. 사람 구경하기는 지하철만한 게 없다. 늦은 시간인데도 승강장부터 만원이었다.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요맘때 들판의 나락 모가지 각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지화면 같았다. 밤 10시 지하 3층에서 선글라스를 낀 아줌마, 꽃무늬 7부 바지에 목도리를 두른 남자, 이어폰도 없이 게임의 효과음을 즐기는 아저씨. 이상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밖에 없는 것 같아 더 이상했다.

열차 출입문이 열리고 들어서려는데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가 문가에 뻗정다리로 서서 스마트 폰 화면에 빗금을 그어대고 있었다. 애초에 비켜주거나 시늉이라도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몰상식한 싸가지!’ 속으로 욕을 하며 비켜 들어가는데 같이 들어가던 여학생과 부딪쳤다. “미안합..”말하려는데 학생은 나를 아래 위로 흘겼다. 내가 길이가 좀 짧은 편이라 훑어보던 시선이 금새 올라왔는데 매서웠다. 딱 아들 나이 또래라 한마디 하려는데 그 아이 입모양이 먼저 움직였다. 소리는 안 나왔지만 뭔 말인지 알겠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냥 조용히 당했다.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내린 환승역에 내렸다.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예전 내가 알고 있던 곳이 아니었다. 역사 앞에는 노천극장처럼 스탠드가 있었고, 나뭇가지 접목하듯 붙어 앉은 암수들은 스킨십 경연이라도 하는 듯 했다. 관음증 환자처럼 흘깃거리며 빠져나오니 대형 주상복합건물과 호텔, 극장이 밤하늘로 솟았다. 그냥 변두리였는데 뉴욕스러웠다. 당황스러웠다. 풍경만 바뀌었을까? 사람들도, 그들의 생각들도 건물 높이만큼 변한 건 아닐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나와 앉아 맥주를 마시며 즐거워하는데, 먼지와 매연 구덩이에서 왜 저러고 있는지 이해 못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어쩌면 저들에게 나는 세상의 변화도 모르는 마초 꼰대 촌놈일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내내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백로들이 새벽 안개 속에서 출격 준비 중이다. 논에 가보면 이들이 사냥한 우렁 껍데기들이 조개무덤처럼 쌓인다.
백로들이 새벽 안개 속에서 출격 준비 중이다. 논에 가보면 이들이 사냥한 우렁 껍데기들이 조개무덤처럼 쌓인다.

매실이랑 개복숭아 항아리 한 번씩 저어 주고 농막을 나서는데 장씨아저씨가 들이닥치셨다. “워디 간당가 뭐 헐라고” “풀 매야죠. 저 콩밭 좀 보세요.” 아저씨는 이미 의자에 앉으셨다. “쉬었다 혀. 찬물 좀 주고.” 일 시작도 못했는데 쉬기부터 하라신다. 물 따라드리고 같이 주저 앉았다. “콩밭에 풀이 작년보다는 덜 허구만. 한 번 맸는가?” “예. 한 번씩은 손 댔는데 못 따라가겠네요.” “저 정도믄 그래도 콩 맺히는데 지장 없응게 쉬엄쉬엄 혀.” 이런 흐름이면 한 시간 정도 쉬어야 한다. “내 신경 쓰지 말고 일 혀” 하시면 30분, “이따 점심이나 같이 허까” 하시면 점심 먹을 때까지, 보통 그렇다.

“엊저녁에 아는 사람 피로연이 있었는데 못 가부렀네.” 피로연은 결혼식 끝나고 인사하는 자리로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조금 달랐다. 결혼식을 멀리서 하거나 못 가는 사람들을 위해 으레 1주일 전 정도에 식당이나 집에서 미리 잔치를 하곤 한다. “결혼식 전에 봉투라도 전해주시면 되죠 뭐.” “아니 그게 아니구 누구 피로연인지 기억이 안 나서 그랴.” “에?” “나도 다 되얐는갑서. 인생 겨울로 접어들고 봉께 망가지는 게 한 두 개가 아니여.” 별 대꾸를 못해드렸다.

아저씨는 바로 화제를 바꾸셨다. “자네 지에피라고 아는가?” “GAP요? 우수농산물인증제도라는 건데 요즘 그거 인증 받는 데가 많은가 봐요. 왜요?” 아저씨는 어려운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말씀을 이으셨다. “그것두 친환경이여? 녹색 사각형 표시로 해놨두마.” “친환경은 아니고 그냥 깨끗하게 관리하면 되는 건가 보던데요.” 아저씨 입술이 손가락 마디만큼 나왔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다. “나 아는 사람이 농약도 치고 제초제도 쓰는데 그거 받았다고 자랑하드마. 그러믄 그거이 친환경은 아니잖은가.”

친환경 인증 종류가 유기농과 무농약으로 간소화 됐는데, 거기에 위생적인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만든 GAP(Good Agricultural Practice)인증을 말씀하시는 거였다. 저농약 인증을 없애는 대신 만들어진 과정이다. 아저씨 말씀은 농약은 다 쓰면서 무슨 친환경이냐 하는 말씀이었다. 실제로 농약을 사용하되 기록하면 되고, 농약도 안전한 장소에 관리만 잘 하면 인증에 문제가 없단다.

“아니 상식적으루다가 말여, 사람덜두 헷갈리는 거 아닌가. 나도 친환경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네만 봐도 그렇지 그게 좀 힘들어? 당연히 표시를 다르게 하던가 해야지. 사묵는 사람들이 보면 그것두 친환경인지 알 거 아녀.” “글쎄요. 말이 많긴 한가 봐요. 어떻게 변하겠죠 뭐.” “허어, 사람이 그렇게 티미하면 안돼야. 잘못된 거이 있으믄 고칠라구 노력해야지. 나 겉은 것은 무식해서 그렇다 쳐두 자네 같은 사람은 해 볼만 하잖은가.” “아저씨 저두 낼 모래면 쉰이예요. 인생 초겨울 다 와가요. 그냥 좀 사람들한테 뒤쳐지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이 맘 같지도 않고. 별로 의욕이 안 나요.” 아저씨가 30분도 안돼 자리에서 일어서셨다. “까불지 말어! 어디서...자네 때가 딱 요맘때여.” 화 나신 것처럼 말씀하셨다. “인자 막 거둬들이기 시작할 때여. 신나서 움직여두 션찮을 판에 겨울 타령하고 앉았네. 정신차리고 움직이라고. 내가 자네만 같으믄….” 아저씨는 나가시고 나는 한참 더 앉아 있었다. 그냥 좀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한 시간을 채웠다.

온통 푸른색이던 들판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모내기 시기에 따라 색깔 농도가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온통 푸른색이던 들판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모내기 시기에 따라 색깔 농도가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장화 속 까실거리던 풀을 털어 신고 밭으로 나섰다. 하얀 콩꽃이 있던 자리는 어느새 납작한 콩꼬투리가 매달려 있었다. 어르신들은 “콩에 꽃 필 때는 풀도 매지 마라”고 하셨다. 열매가 맺혀야 하는데 꽃이 떨어지면 안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초는 분명 그 때를 노렸다. 속수무책으로 쑥쑥 자라나 콩을 내리 눌렀다. 꽃 필 때 풀 매지 말란 얘기는 콩들이 만들어낸 얘기인 것 같다. 아니면 그런 말씀하신 오봉댁 어머니나 간전댁 할머니가 콩이랑 같은 편이 아닌가 의심도 든다.

어디를 먼저 조질까 생각하며 고랑을 살펴보는데 북소린 듯 징소린 듯한 낮은 울림이 들렸다. 뭘까 하고 내려다보니 저 아랫밭 한가운데 불쑥 솟은 봉분 앞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고깔을 쓴 뒷모습이 보였고 한 아주머니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연신 손을 엇갈리게 돌리며 무덤에 대고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어려움이 있어서 저러실까’ 생각이 들어 한참 쳐다봤다. 산 사람에게도 저렇게 오래 빌면 소원을 들어줄 법한데 잘 되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의식은 경건한 법, 차분한 마음으로 밭에 들어서 콩밭 매는 아낙네 놀이를 시작했다.어느새 바래기가 고랑을 덮었고, 한삼 덩굴과 명아주가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히고 설켜 있었다. 지팡이 삼을 만큼 키가 자란 명아주는 뿌리에 흙덩이를 달고 나왔고 덩굴은 걷어낼수록 콩을 감싸고 조였다. 바래기는 뿌리를 움켜쥐고 머리끄덩이 잡듯 뽑아내니 귀신 머리채마냥 쓸려나오며 콩잎을 떨궈댔다. 열도 나고 호흡도 가빴다. 나즈막하던 징 소리는 점점 커지고 빨라졌고 옆집 개 희동이는 이유도 없이 하늘을 향해 짖어댔다. 풀 더미를 손에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왠지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순간 관자놀이가 뜨끔했다. 나도 모르게 내 귀싸대기를 갈겼다. 손바닥에는 두 개의 까만 점과 빨간 실금이 손금을 따라 퍼져 있었다. 이런, 한참 전에 입이 돌아 갔어야 할 모기 놈들이.

콩밭에서 뽑아낸 바래기 더미가 콩 높이만큼 쌓여 있다.
콩밭에서 뽑아낸 바래기 더미가 콩 높이만큼 쌓여 있다.

가을은 무슨 가을. 가을이 언제냐고? 긴 소매? 9월? 다 틀렸다. 그건 내가 정할란다. 진정한 가을은 모기가 한 마리도 없는 바로 그 날이라고. 목도리를 둘러도, 11월이 지나도, 모기가 날아다니는 한 가을은 멀었다고.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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