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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기자, 쓰지 못한 이야기] “정신차리고 팩트 확보해”

입력
2016.11.2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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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서울의 대학교 식당 입구에 경비소장 교체를 요구하는 구호가 붙어 있다.
지난 7월 서울의 대학교 식당 입구에 경비소장 교체를 요구하는 구호가 붙어 있다.

“경비가 빵셔틀이냐? 사람답게 살게 해달라.”

지난 7월초, 선배 취재 지시로 서울 한 대학에서 경비 소장 교체를 요구하고 있다는 경비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경비소장이 폭언과 갑질을 일삼았다며 용역업체를 항의방문하려던 차였습니다. 대부분 60대 이상인 경비 노동자들에게 무슨 일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구호까지 외쳤는지 물었습니다.

분노한 경비 노동자들의 증언은 쉬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빵 사와라 약 달여라, 우리가 빵셔틀이냐?” “부인에게 해고 통보를 하겠다며 협박하는 것이 말이 되냐?” “잦은 폭언에 정신과 약까지 먹는다” 등등…. 경비소장의 갑질 행태에 대한 폭로는 1시간이 지나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들 60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인격적 모멸감에도 가족을 생각하며 버텼다는 말을 듣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경비소장 밑에서 동료 3명이 죽어나갔다”는 말이 또렷히 귀에 들어왔습니다. 경비 노동자들의 연세를 생각하니 정신적 스트레스와 육체적 과로로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의 증언은 꽤나 구체적이었습니다. 경비소장 때문에 평소 스트레스를 호소하던 동료가 출근길 지하철에서 쓰러졌고, 부당한 이유로 해고된 동료도 억울한 마음에 학교 근처를 배회하다 쓰러졌다고 전했습니다. 사실이라면 악덕소장의 살인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서둘러 보고했습니다. “선배, 3명이 과로사로 사망했지만 산재처리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곧 선배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한 쪽 이야기만 듣고 무슨 기사를 써? 증거 있어?”

생각해보니 증거를 챙기기는커녕 상대방 이야기조차 듣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뒤늦게 확인을 시작했습니다. 기사에 넣으려면 마감시간까지 증거를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연락이 닿지 않았고 겨우 연락이 닿은 유가족 한 명도 지병이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용역업체는 일절 답변을 거부했고, 노동조합 역시 입증이 쉽지 않을 것 같아 소송을 제기하지는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반면 경비소장은 오히려 자신이 노동자들의 근무태만과 무시에 시달렸다고 반박했습니다.

결국 이렇다 할 근거가 없어 기사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선배는 “정신차리고 팩트 확보해”라는 말과 함께 양쪽 입장을 충실히 들으며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약자의 목소리를 담겠다는 마음만으로 기사를 쓸 수는 없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기사로 쓰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실 확인과 자료 확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 쪽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을 경계하며 객관적 사실에 기초해 기사를 쓰는 것이, 당사자들 그리고 기자 스스로에게도 중요한 덕목임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기자가 밝혀낼 수 있는 사실이 어디까지인지 답답해졌습니다. 고령의 노동자들이 업무 스트레스에 죽음을 맞은 것이 설령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밝혀낼 도리가 없다는 안타까움이 느껴졌습니다. 그 죽음이 아니고서는 경비 노동자들의 현실이 다뤄지지 못할 것이라고 예단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씁쓸했습니다. 과로사나 성폭력 같은 극단적 사례가 아니고서야 비정규직의 열악한 노동실태는 너무나 일상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내심 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죽음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동료들의 말이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기자가 바람이나 추측만으로 기사를 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한 쪽으로 마음이 쏠릴 때마다 떠올리곤 합니다. "정신차리고 팩트 확보해."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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