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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Biz 리더] 전기차왕된 ‘배터리왕’

입력
2017.10.21 10:0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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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마을 목공의 아들로 태어나

형의 헌신적 뒷바라지로 공부

4억원 빌려 직원 20명과 시작

배터리ㆍ전기차 잇단 성공 신화

F3DMㆍE6 등 작년 10만대 팔아

테슬라 제치고 2년 연속 1위

“기술자는 나의 자본이다” 열정

또다시 경전철 사업 성공의 꿈

전 세계에서 전기자동차를 가장 많이 판매하는 기업은 어디일까? ‘전기차의 원조’ 미국 테슬라를 떠올리겠지만 실제 주인공은 중국 기업 비야디(比亞迪ㆍBYD)다. BYD는 지난해 전기차를 총 10만183대나 팔아 2015년에 이어 2년 연속 전기차 판매 1위의 자리를 이어갔다. 삼성전자도 지난해 7월 BYD에 5,100억원을 투자, 지분 1.92%를 확보했다. 시장에서 BYD의 회사가치를 26조원 이상으로 평가한 셈이다. 현재 국내에서 회사가치가 26조원을 넘는 회사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포스코, 삼성물산, LG화학, 네이버, 한국전력 등 8개사(19일 종가 기준) 정도에 불과하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미국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BYD에 대해 “신기한 회사”라고 평가했다. 지난 1995년 낡은 차고에서 직원 20명으로 출발한 BYD는 배터리 ‘불모지’ 중국에서 8년 만에 세계 2대 배터리 업체로 도약했다. 또 2008년 전기차 시장에 뛰어든 지 불과 7년 만에 테슬라를 제치고 전기차 ‘넘버원’ 자리를 차지했다. 이 같은 BYD의 ‘광폭 성공’ 스토리는 이 회사의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인 왕촨푸(王傳福) 회장(51)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29세 연구원 박차고 나와 ‘맨주먹’ 창업...8년 만에 ‘배터리왕’

왕 회장은 1966년 안후이(安徽)성의 한 시골 마을에서 목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 이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형 왕촨팡(王傳方)은 학교를 중퇴한 뒤 동생의 학업 ‘뒷바라지’를 위해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형은 동생에게 항상 “공부만이 유일하게 살 길”이라고 다독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형의 헌신에 힘입어 왕촨푸는 83년 현 중난(中南)대의 전신인 중난채광야금대학 야금물리화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87년 비철금속연구원에 들어가 배터리에 대한 연구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6살 이른 나이에 실험실 부주임으로 승진하는 등 일찌감치 능력을 인정 받은 그는 93년 연구원 산하 배터리 회사인 ‘비거전지유한공사’ 대표로 임명됐다. 이후 배터리에 대한 ‘실전경험’을 쌓으며 베터리 분야가 향후 엄청나게 성장할 것으로 확신했다. 95년 사촌 형에게 거금 250만 위안(약 4억원)을 빌려 충전용 휴대폰 배터리를 생산하는 BYD를 설립했다. 배터리의 잠재력에 인생을 건 것이다.

광둥(廣東)성 선전시의 낡은 차고에서 직원 20명과 뜻을 함께 한 게 BYD의 시작이었다. 왕 회장은 일본 등 외국 선진기업에 버금가는 배터리 기술을 개발하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휴대폰 매장에 대당 2만 위안(약 350만원)의 ‘고가’ 휴대폰을 사려는 사람이 넘쳐났다”며 “배터리 수요가 폭발할 것으로 믿었다”고 회상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97년 대만 최대 휴대폰 업체였던 ‘다바’가 BYD의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인정, 배터리 공급처를 일본 산요전기에서 BYD로 바꾼 게 도약의 발판이었다. 그 해부터 매년 2배 이상 성장세가 이어졌다. 창업 8년 만인 2003년 BYD는 글로벌 2위 휴대폰 충전용 배터리 업체로 도약했다. 사람들은 BYD를 ‘중국의 파나소닉’, 왕촨푸를 ‘배터리왕’이라 불렀다.

배터리 회사에서 자동차 회사로

배터리 회사로서 입지를 다진 왕 회장은 2003년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졌다. 경영난에 빠진 국영 시안친촨(西安秦川) 자동차 지분 77%를 2억6,900만 위안에 인수한 것이다. 배터리 분야에서 축적한 기술력을 자동차 시장의 미래인 전기차에 접목하겠다는 ‘모험’이었다. 시장은 냉담했다. BYD 주가가 18홍콩달러에서 9홍콩달러로 ‘반토막’ 나기도 했다. 하지만 왕 회장은 전기차 시대의 개화를 확신했다. 마침 운도 따랐다. 중국 정부가 2004년 자동차 공장 신설 투자액을 2억4,000만 달러 이상으로 제한하며 진입 장벽이 높아졌다. 친환경 자동차를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도 받게 됐다. 자동차가 불티나게 팔렸다. 5년 간(2004~2008년) 매출이 매년 2배씩 성장했다.

2008년 9월 버핏 회장은 2억3,000만 달러를 투자, BYD 지분 10%를 인수했다. 전 세계가 BYD에 주목했다. 버핏은 “(BYD는) 자동차의 미래를 대표하는 업체”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BYD는 그 해 말 세계 최초로 양산형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전용차 ‘F3DM(Dual Mode)’을 선보이며 전 세계를 다시 깜짝 놀라게 했다. 2003년 전기차 개발을 시작한 지 5년 만의 결실이었다. F3DM은 1회 충전으로 80~100km를 주행할 수 있었다. BYD는 이어 2011년 순수 전기차인 ‘E6’를 시장에 선보였다. 마침내 2015년 BYD는 총 6만3,000대의 전기차를 판매하며 테슬라(5만557대)를 제치고 세계 시장점유율 1위(11%)를 차지했다.

기술에 미친 사나이이자,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가

BYD의 고속 성장은 기술을 중시하는 왕 회장의 경영 방식과 관계가 깊다. 왕 회장은 ‘전기차를 다른 회사의 절반 가격에 판매한다’는 원칙을 세운 뒤 기술 개발을 위해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평소 BYD 기술자에 대해 ‘나의 자본’이라고 말했다. 왕 회장 스스로 BYD의 전기차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해 열정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가 직접 개발에 뛰어들어 만든 전기차가 바로 2012년 출시된 ‘F3’였다. F3는 타이어와 유리를 빼고 모든 것을 BYD가 자체 생산한 자동차다. 실제로 기술 측면에서 BYD는 이미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한다. 이미 1만323개의 전기차 관련 특허를 보유(2015년말 기준)하고 있다. 총 특허 출원 개수는 1만5,365개에 달한다. 찰스 멍거 버크셔해서웨이 부회장은 왕 회장을 “발명가 에디슨과 잭 웰치 전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을 합친 듯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기술가와 경영자의 면모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왕 회장의 도전 정신도 BYD 성장의 근간이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나는 실행하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감히 생각하려 한다”는 왕 회장의 말은 그의 경영철학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최근 BYD는 전기차에 이어 경전철(모노레일) 사업을 신성장 동력으로 선정했다. 왕 회장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 2ㆍ3선 도시의 교통 체증은 이미 해묵은 과제”라며 “BYD는 대중교통 시장에 초점을 맞춰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언했다. 실제 BYD는 중국 국가개발은행과 양해각서(MOU)를 체결, 2ㆍ3선 도시 위주로 모노레일 사업을 확장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왕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꿈’이다. BYD의 회사 이름에는 ‘당신의 꿈을 이뤄라’(Build Your Dreams)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불과 29세의 나이에 BYD를 설립해 22년 만에 종업원 22만명에 달하는 세계 1위 전기차 회사를 일궈낸 왕 회장의 꿈이 어디까지 이어질 지 궁금하다. 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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