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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테러리스트가 되지 못한 문학인

입력
2016.09.02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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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적인 혹서였다는 것과 함께, 나에게 올해 여름은 이병주의 대표적인 중단편 소설을 대량으로 발견한 여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작품을 집중해서 읽게 된 사연은 소소하다. 자주 가는 단골 헌책방에 어느 출판사가 이병주의 등단작 ‘소설 알렉산드리아’(바이북스,2009)를 시작으로 낱권으로 펴내기 시작한 그의 작품집이 무더기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대학교를 다녔다면 그의 대하 장편 ‘지리산’을 ‘커리’ 삼아 읽었겠지만, 나는 이상한 곳(?)에서 그의 등단작을 겨우 읽었을 뿐이다. 그 이후 ‘대통령들의 초상’(서당,1991)이라는 질겁하고도 남을 인물 비평집을 우연히 읽고 나서 그와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재학 중이던 이병주는 1944년,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1년 8개월 동안 일본군으로 복무한다. 이 체험은 그에게 일제에 저항하지 못했다는 씻기 어려운 치욕을 안겼다. 1965년에 발표한 ‘소설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인 친구를 숨겨 주었다가 게슈타포에 발각되어 고문을 받고 죽은 요한의 형 한스 셀러가 나온다. 그는 동생을 죽인 게슈타포 장교 엔드레드를 처단하기 위해 십오 년째 세계 각지를 헤매고 다녔다. 1973년에 초간 된 작가의 산문집 ‘백지의 유혹’(남강출판사)에는 한스라는 이름의 유래가 나온다.

이병주는 1956년 무렵, 그 전해에 일본어로 번역된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책을 입수했다. 그 책은 나치에 저항했던 뮌헨 대학생들의 지하 서클 백장미단의 활동을 기록한 것으로, 이 단체의 일원이었던 한스 숄과 조피 숄 남매는 반나치ㆍ반전운동이 발각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이병주는 자신의 데뷔작에 그가 찍소리 내지 못하고 일본군으로 끌려가기 한 해 전에 사형된 한스 숄을 기념하고자 했다.

“나는 이 책을 학생들에게 공개하면서 같은 시기, 나 자신은 일제의 강제를 물리치지 못하고 용병(傭兵)으로 끌려갔다는 자조적인 참회를 덧붙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행동을 권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동이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인식만은 갖도록 하자’고 했다.” 1978년 도서출판 청사에서 처음 번역된 이 책은 현재도 여러 종의 번역본이 판매되고 있다.

한때 ‘국민작가’였던 이병주에 대해서는 많은 평론이 나와 있으나, 그의 작품에 자주 나오는 테러리스트 모티프와 테러리스트론(論)은 제대로 검토되지 못했다. 이병주는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輓詞)’(바이북스,2011)에서 테러리스트는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이미 죽은 자, 즉 영혼이 죽어버린 자를 죽이는 것이라는 논변을 펼쳤다. 이미 죽은 자를 죽인다는 논리에 따르자면, 테러리스트는 아무도 죽이지 않는 것이 된다. 또 ‘변명’(바이북스,2010)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려면 “선인(善因)엔 선과(善果)가 있고 악인(惡因)엔 악과(惡果)가 있어야 한다”면서, 그러한 섭리(인과의 법칙)가 이루어지도록 소명된 사람이 테러리스트라고 말한다. 중국에서 귀국하는 길에 이병주는 그런 소명을 받은 적이 있었으나 우물쭈물하며 실천하지 못했다. 테러리스트가 되지 못한 그가 대신 선택한 것이 정론직필을 휘두르는 언론인이다. 그러나 5ㆍ16 쿠데타에 대해 삐딱한 사설을 썼다는 이유로 10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던 중, 2년 7개월 만에 출옥한 이병주는 소설가로 변신했다. 그가 매긴 등급에 의하면 가장 고귀한 인간은 테러리스트, 그다음이 언론인, 가장 하수가 문학인이다. 그에게 소설 짓기란 테러리스트가 되지 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작가는 자신의 산문집에서 언론인의 무문곡필(舞文曲筆ㆍ붓을 함부로 놀려서 왜곡된 글을 씀)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 하나는 견식 부족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무문곡필.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을 번연히 알면서 저지른 교활한 무문곡필. 이병주가 말년에 쓴 ‘대통령들의 초상’은 그가 직접 만나고 겪었던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에 대한 인물평이다. 전두환을 평하며 작가는 두 가지 종류의 무문곡필을 가리지 않고 과시했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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