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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Me Too, 용기가 삶을 바꾸는 소리

입력
2018.03.09 16:5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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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스토킹을 당한 적이 있다. 가해자는 자신을 받아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문자를 여러 차례 보냈고, 집 앞에 찾아오거나 온라인에서 끈질기게 친구요청을 했다. 나를 스토킹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같은 협동조합의 조합원이었다. 거절해도 소용없었다. 내게 ‘공포’였던 시간을 그는 ‘로맨스’라고 여기는 듯했다.

집에 있을 때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불을 끄고 숨죽여 지냈다. 집 밖을 나설 때부터 모든 사람은 경계 대상이었다. 일상 그 자체가 늘 긴장과 공포였다. 주변에 알렸을 때, 반응은 이랬다. 시간이 지나면 멈출 거야, 전화번호와 집을 알 정도면 친했던 사이가 아니냐, 네가 처신을 잘못해서 상대가 그런 ‘오해’를 한 건 아니냐. 은연중에 나를 추궁하고 행실을 단속하는 말은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날도 그랬다. 가해자가 온라인에서 친구요청을 했다. 참다 못한 나는 조합 내 게시판에 글을 올렸고, 거기에 발끈한 가해자는 언어폭력을 행사했다. 이것을 계기로 조합 내에 여성혐오, 성폭력, 여성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공론화했다. 조합원들은 여성주의 모임을 만들었고 세미나를 시작했다. 모임에서 내 경험을 꺼냈을 때, 다른 여성조합원들도 동일 인물에게 스토킹을 당했으며 그 동안 두려워서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모임에서 파악된 피해자만 여럿이었다. 지금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미투 운동이, 조직에서는 비교적 일찍 일어난 셈이다.

가해자는 윤리위원회에 회부되었다. 그는 오히려 내가 가해자라고 몰아갔다. 윤리위원들과 접촉을 시도하거나, 자신에게 호의적인 조합원들에게 억울하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써서 유포하기도 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2차, 3차 가해가 일어났다. 윤리위원회의 결정이 내려지기 전, 그 사람은 조합에서 탈퇴했고 조직은 사건을 해결할 구속력을 잃어버렸다. 몇 달 후 그는 다른 단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협동조합이나 시민단체와 같은 비영리 조직은 ‘신뢰’, ‘협동’, ‘사회적 가치’를 바탕으로 움직인다. 인권감수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인권을 강조하면서도 젠더 폭력을 행사는 사람들도 많다. 인권감수성과 젠더 감수성이 다르게 작동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호의적이고, 모두가 1인 1표를 갖고, 평등한 조직이라고 믿는 곳에서는 젠더 권력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배려와 호의를 때로 연애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친밀성의 모호함 때문에 명확하게 성폭력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우나 불편한 일은 빈번히 발생한다.

몇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를 잊은 적이 없다. 여전히 가해자와 닮은 사람만 보더라도 심장이 뛰고 그 당시 공포의 기억과 감각이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가해자의 사과도,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달라졌고, 우리는 달라졌다. 조합원들은 성 평등 규약을 만들었고, 각종 행사나 교육에 참여할 때마다 성 평등 규약에 동의해야 한다. 또 성평등위원회를 구성해서 정기적으로 여성주의 교육을 기획하고,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기 위한 노하우를 쌓아가고 있다. 모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일터에서 성 평등 기구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거나, 수시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독서모임을 통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미투 운동이 일어나는 요즘, 일상에서 작은 변화를 느낀다.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를 만나든지 미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피해를 보았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매뉴얼과 지원처가 빠른 속도로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백을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라, 고백하더라도 안전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도 말한다, #Me Too. 나는 당신과 함께 할 것이다, #With You. 우리는 연대하며 함께 살아갈 것이다.

천주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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