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ㆍ북미ㆍ남미 등 점령하며
실사용자 1억5000만명 이상
단기간에 업계 최고 자리 꿰차
10대에 홈페이지 제작 사업 시작
온라인 광고회사 운영하다 매각
큰 돈 만졌지만 방황 시작
냅스터 저작권 침해 고민하다
음악 사이 광고 넣는 서비스
급성장에도 흑자 전환은 못해
“냅스터(음원 파일 공유 서비스) 등장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던 음원 산업이 처음으로 성장세로 돌아섰다. 그건 대부분 단 한 사람, 다니엘 에크 덕분이다.”
미국 대중음악 전문지 빌보드는 지난해 초 음악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100인을 꼽으며 디지털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 스포티파이의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다니엘 에크(35)를 1위로 선정했다. 1999년 정점을 찍은 세계 음원 산업 매출(음반 등 물리적 매체와 음원 다운로드, 스트리밍 합산)이 줄곧 감소하다 17년 만인 2016년 처음으로 성장세를 기록한 것에 대한 찬사였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 역시 5년 전인 2012년 1월 에크를 표지 모델로 세우며 ‘음악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웠다.
국내에는 아직 서비스되지 않아 낯선 회사지만 스포티파이는 음원 스트리밍 부문 세계 최고 강자다. 팝 그룹 ‘아바’로 유명한 북유럽 음악 강국 스웨덴에서 2006년 설립돼 2008년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으니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미국의 유사 서비스 판도라보다는 3년, 한국의 벅스뮤직보다는 8년이 늦은 출발이었다. 변방에서 온 후발주자였지만 스포티파이는 유럽과 북미ㆍ남미, 오세아니아 등을 점령하며 단기간에 업계 최고 자리를 꿰찼다.
2010년 50만명에 불과하던 유료회원 수는 4년 만에 20배로 뛰며 1,000만명을 넘어섰고 다시 4년 만인 이달 7,000만명을 돌파했다. 무료 회원을 포함하면 실사용자 수는 1억5,000만명 이상이다. 2017년 유료 회원 수 기준 세계 시장 점유율은 40%로 2위인 애플뮤직(19%)의 2배가 넘는다. 아시아에선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 이어 2016년 일본, 지난해 태국에서 서비스를 개시했는데, 토종 음원 서비스 업체가 장악하고 있는 우리나라와 중국에도 진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년 사업가의 때 이른 성공과 방황
다니엘 에크는 어린 시절부터 스포티파이의 두 핵심축인 음악과 정보통신(IT) 테크놀로지에 익숙했다. 스톡홀름 외곽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음악과 컴퓨터가 공존하는 집안에서 자란 덕이다. 외할머니는 오페라 가수였고 외할아버지는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네 살 때부터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할 정도로 재능을 보였지만 소년은 일찌감치 음악가 대신 사업가의 길을 택했다. 그를 사업가로 이끈 것은 모계 혈통으로 물려받은 음악적 재능이 아니라 IT 업계에서 일하던 새아버지 덕에 다섯 살 때부터 접한 컴퓨터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한 에크는 14세 때 홈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처음엔 우리 돈으로 10만원, 20만원씩 받다가 실력이 일취월장해 이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벌이며 건당 500만원씩 받기에 이르렀다. 18세 땐 또래 친구들 25명을 고용할 정도로 사업이 커져 월 순수익이 1,500만원을 넘어섰다. 고등학교 시절엔 당시 신생 기업이었던 구글에 입사 지원서를 냈다가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일도 있었다. 분기탱천한 소년은 어린 마음에 이런 생각을 품었다고 한다. ‘구글과 상대할 검색 엔진을 만들어 경쟁하겠어.’
에크의 야심 찬 프로젝트는 실패했지만 일찍부터 관련 업체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세계적 명문대인 스웨덴왕립공대에 진학했으나 1학년 내내 수학 이론을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8주 만에 자퇴했다. 이후 광고회사, 경매회사 등에서 일하던 그는 온라인 광고회사 애드버티고를 설립해 운영하다 2006년 또 다른 광고회사인 트레이드더블러에 팔았다. 회사를 매각하고 큰돈을 쥐게 됐지만 성취감보다는 허탈한 마음이 더 컸다. 어릴 적 꿈꾸던 빨간색 페라리 360 모데나를 몰며 최고급 클럽에서 비싼 샴페인을 마셔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울했어요. 어울리던 여자들도 나를 이용하는 것만 같았고 친구들도 진짜 친구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돈만 생기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큰돈을 벌고 나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합법적 무료 음악 서비스를 꿈꾸다
에크는 아끼던 스포츠카를 팔고 고급 아파트도 내놓은 뒤 친가 인근에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겼다. 애드버티고를 인수했던 트레이드더블러의 마르틴 로렌트존과 이야기를 나누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 보기로 했다. 로렌트존과 대화는 늘 음악 이야기로 끝이 났다. 냅스터를 통해 록 밴드 메탈리카에 빠지고 레드 제플린, 킹 크림슨, 비틀스, 데이비드 보위, 섹스 피스톨스, 클래시 등에 심취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새로운 사업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냅스터는 엄청난 경험을 선물해줬지만 저작권을 침해하는 방식은 사업 모델로 적당하진 않았어요. 게다가 다운로드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바이러스 위험도 있죠. 저작권을 지키면서 무료로 세상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할 수 있는 사업이 어떤 걸까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냅스터는 중앙 서버를 두지 않고 사용자들끼리 서로 음원 파일을 무료로 주고받을 수 있게 한 컴퓨터용 프로그램이었다. 냅스터가 등장한 1999년은 음반 산업이 사상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때였다. 그러나 음반 업계는 샴페인에 취해 디지털 혁명이라는 격변의 소용돌이를 대비하지 못했고, 이후 매출이 매년 뚝뚝 떨어지는 걸 하릴없이 지켜봐야 했다. 냅스터 서비스가 유지된 건 단 2년에 불과했지만 음악 산업의 판도를 뒤바꿔놓을 만큼 그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스웨덴에선 상황이 좀 더 심각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정부의 ‘디지털 네이티브’ 정책에 따라 유럽에서 가장 빠른 고속 광대역망이 깔리고 인터넷 사용이 일반화된 데다 냅스터 인기가 치솟으면서 불법 파일 다운로드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일반적인 음악 소비문화로 자리 잡았다. 미국 음반 업계는 소송을 통해 인터넷 해적 냅스터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순 없었다.
냅스터와 관련해 로렌트존과 이야기를 나누다 에크는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음악을 다운로드 하지 않고도 합법적이면서도 공짜로 듣게 할 순 없을까. 음악 사이에 광고를 듣게 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음악 저작권자도 돈을 벌 수 있고 사용자도 공짜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하는 서비스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라디오에서 광고가 나오듯 음악을 몇 곡 들은 뒤엔 광고를 듣게 하고, 광고비로 저작권료를 지불하면 가능하리라 판단했다. 광고를 듣고 싶지 않은 사람에겐 일정 금액을 받고 유료회원(월 이용금액 12달러)으로 가입하게 하면 될 터였다.
변방의 후발주자, 업계 평정 비결
대형 음반회사와 계약을 맺는 것이 급선무였다. 유니버설, 워너, 소니 등 글로벌 음반사와 접촉했으나 스웨덴의 신생 업체에 관심을 보이는 회사는 없었다. 에크는 훗날 “3년간 ‘맨땅에 헤딩’하는 일을 해야 할 거라고 누군가 내게 말해줬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계획을 바꿔 지역별로 주요 음반사의 지사와 계약을 하는 방식으로 저작권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미국 지역 음반사와의 협상은 냅스터 창업자인 션 파커가 맡았다. 스포티파이의 가능성을 알아본 파커가 먼저 에크에게 접촉해 투자를 제안하면서 이뤄진 일이었다.
저작권료 계약을 하나둘 마무리하며 스포티파이의 라이브러리는 확장을 거듭했다. 회원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에크가 스포티파이를 설립한 2006년은 아직 아이폰이 세상에 등장하기도 전이었고, 음원 서비스를 시작한 2008년에도 미국을 제외한 많은 나라에 아직 아이폰이 출시되지 않은 상태였다. 컴퓨터용 음악 서비스로 시작한 스포티파이는 곧이어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날개를 달았다.
스포티파이는 간결하고 편리한 UI(사용자 환경)와 차별화된 서비스로 사용자를 끌어모았다. 에크와 스포티파이의 동료들은 사용자의 반응을 면밀히 분석하며 최적화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사용자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수시로 단점을 개선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계속 제공해 경쟁사로 이탈하는 것을 막았다. 마케팅 방식도 독특했다. 서비스 초기엔 유료회원이 아닐 경우 기존 회원의 초대를 받아야만 무료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도록 해 호기심을 자극했다. SNS와 빅데이터도 적극 활용했다. 유명인과 친구, 타인의 플레이리스트(재생목록)를 공유할 수 있도록 했고, 사용자의 청취 패턴과 특성, 빅데이터 등을 정교하게 분석한 추천 음악으로 취향을 공략했다. 2011년 페이스북과 제휴를 맺고 페이스북 아이디로 간단히 가입할 수 있도록 하자 회원 수도 급속도로 늘어났다.
성장과 흑자, 두 마리 토끼 잡을까
스포티파이는 올해 3월이나 4월 상장을 목표로 지난 연말 뉴욕증권거래소에 직상장(Direct Listing)을 비공개로 신청했다. 직상장이란 별도 기업공개(IPO) 절차 없이 기업이 직접 증권 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는 것으로 신주 공모 없이 현재 주식을 거래소에 등록해 자유롭게 거래하는 방식이다. 기업 입장에선 IPO 과정에서 은행에 지불해야 하는 거액의 수수료와 시간을 아낄 수 있고 기존 주주들이 곧바로 보유 주식을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지만 상장 시점에 대규모 자금 유입이 어려워 현금을 충분히 보유한 회사가 아니고선 잘 시도하지 않는다. 스포티파이는 최근 중국 인터넷 대기업 텐센트와 실시한 지분교환에서 기업가치가 약 150억~200억달러(약 16조~21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스포티파이에 대한 일반 투자자들의 평가가 어떨지는 예측이 어렵지만, 200억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면 올해 최대 규모의 상장이 될 전망이다.
지속적인 성장과 음악 산업 내의 막대한 영향력에도 스포티파이에겐 창사 이래 한 번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는 약점이 있다. 매년 회원 수가 늘면서 회사도 급성장하고 있지만 그만큼 저작권료 지출도 늘고 있고, 영업손실 또한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16년 영업손실은 5억3,900만에 달했다.
일각에선 올해부터 흑자로 전환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지만, 유료 회원에게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70% 이상을 저작권료로 지불하고 있는 만큼 스포티파이가 사업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수익을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에크는 스포티파이의 밝은 미래를 확신한다. “우리는 스포티파이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 믿음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수익을 낼 것이라는 믿음도 있고요. 지금 확보한 시장보다 10배나 더 큰 시장이 아직도 열리지 않은 채 있다면 단기 수익을 위해 회사를 최적화시키기보다 성장을 위해 투자를 해야 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우리 앞엔 어마어마한 기회가 있습니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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