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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삶의 시차

입력
2018.01.23 14:2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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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다녀왔다. 아버지의 흰머리가 그새 더 늘어 보여 염색은 안 하세요? 하니 머리가 아파서 못한다고 하신다. 거실에서는 TV를 보던 외할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셨다. 할머니 잘 지내셨어요? 하며 웃다가 난 이내 무슨 말을 이어갈지 생각을 한다. 얼마 전부터 날씨가 추워지자 아버지는 시골에서 외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외할머니 얼굴에 주름이 더 는 것 같다. 어머니 말로는 최근 틀니 수술을 받고 갑자기 심해지셨다고 한다. 병원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노인에게 굳이 필요 없는 수술을 시켰다고 한숨을 내쉰다.

다음주가 외할아버지 기일이죠? 하니 할머니는 아이구 역시 우리 맏외손주여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을 혀... 하며 내 손을 꼭 잡으신다.

할머니의 일상은 아침에 일어나셔서 식사를 하고 TV를 보다 햇살 좋은 날 어머니와 찬찬히 공원 산보를 가시는 것이다. 어머니는 천천히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집안을 치우고 교회에 가신다. 그리고 아들이 오는 날엔 꼬막이며 멸치며 반찬 짐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아마 그 날 큰아들 내외가 다녀온 시간이 그분들에겐 평소보다 더 빠른 하루였을 것이다. 반면 내게는 도시의 바쁨을 털고 공원에서 아버지와 배드민턴을 치던, 꽤 여유 있는 하루가 되었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붙잡고 늘 내 어릴 적 얘기를 하신다. 다섯 살 때 동네 형들과 놀다 비가 오면 꼴찌로 뛰는 게 나였다는 얘기, 고3 때 내가 먹던 통닭이 남아도 다음날 내가 찾을까 봐 먹지 못했다는 얘기 등등. 이미 나는 까맣게 잊은 그것들이, 어머니에겐 출생부터 성장하고 장성한 아들의 모습들이 같은 시간의 선상에서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머니와 나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은 지구보다 시간이 몇 천 배는 더 느린 행성에 떨어진다. 그곳을 잠깐 다녀오자 이미 지구에서는 2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버렸다. 그가 우주선에 앉아 모니터로 그 동안의 메시지들을 볼 때, 어린 아들이 자라고 대학에 들어가 결혼하고 손자를 낳는 것까지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에게도 똑같이 와 있다. 그 누구도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시간 앞에서 가장 겸허해진다.

서로 같은 시간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차를 산다. 군대는 시간이 가장 다른 곳 중 하나였다. 산 위에서 바라 본 구름은 정말 빨리 흐르는데도, 밑에서 볼 때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아주 오랜 시간을 견뎌 드디어 휴가를 나와도 사람들은 벌써 나왔어? 한다. 결국 한 번 어긋난 나와 그들의 시차를 다시 맞추긴 쉽지 않았다.

퇴사 이후의 시차도 다르다. 전 회사의 동기들을 만났다. 벌써 승진을 하고 또 다른 부서로 이동하고 어디에 아파트를 사고 아이가 몇 살이라고 한다. 아직은 매일 생존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창업가인 나에게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퇴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직장에서는 1년이 한 달처럼 흘러갔는데, 창업을 하면서는 한 달이 1년같이 흐른다.

요즘은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와 시차를 느낀다. 십 년 전엔 뜨거웠던 그것들이 지금은 무뎌져 버린. 퇴사 직후 백수 시절 느꼈던 시간들과, 창업 후 느낀 시간들이 다르다. 그리고 이제는 창업이라는 일조차 또 다른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다음주도 그 다음주도 월요일에 출근하고 금요일에 퇴근할거라고 믿는 – 또는 그렇게 착각하는 – 명백한 삶들. 예측 가능하다는 것, 안정적이라는 것은 시간을 가속화한다. 따라서 우리 인생의 시간은 줄어가나 시차는 늘어간다.

그러나 가끔은 시차가 줄어드는 때도 있다. 할머니와 어머니, 오래 떨어져 있던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날 때, 오래 전 잊어버린 나 자신을 다시 만날 때.

장수한 퇴사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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