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혜정 기자

박고은
PD

신현욱
인턴PD

등록 : 2017.10.21 09:00
수정 : 2017.10.24 15:21

[인물360˚] “저희 가족이, 국민이 아직 바다에 있습니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

등록 : 2017.10.21 09:00
수정 : 2017.10.24 15:21

스텔라데이지호 참사 가족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있는 허영주(왼쪽)ㆍ허경주(오른쪽)씨가 1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의 컨테이너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고은PD

“내가 탄 배가 바다에 빠졌더라도 동생은 절 찾기 위해 끝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포기할 수 없는 거에요.”

누나들이 고향에 오면 늘 직접 잡은 장어를 손질해 구워주던 살가운 동생. 스텔라데이지호의 2등 항해사 허재용(33)씨의 모습을 떠올리던 큰누나 허영주(40)씨의 얼굴에 미소와 눈물이 함께 번졌다. 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만난 영주씨는 “침몰 사고가 난지 200여일이 지났지만 동생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게 될 줄 미처 몰랐다”고 한다. 그와 둘째누나 허경주(38)씨는 그 동안 생업을 뒤로 한 채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각 부처의 문을 두드려왔다. ‘수색을 재개하고 사고 원인을 밝혀달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난 3년여간 세월호 참사 가족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서명운동 및 농성을 벌여 ‘세월호광장’이라는 별칭이 생긴 곳에서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이 주황리본을 달고 수색 재개를 위한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주황리본과 같은 색의 구명벌을 찾는 것이 이들의 마지막 희망이다.

골든타임 놓치고 노후선박 출항한 ‘제2의 세월호’

4월 1일 만우절에 거짓말같이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자매의 삶은 180도로 달라졌다. ‘재용이가 탄 배가 연락이 안 된다는데 어떻게 해야하니’라는 어머니 이영문(68)씨의 말에 깜짝 놀라 온 가족이 부산에 있는 선사에 모였다. 사고는 하루 전인 3월 31일에 발생해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상태였다.

축구장 3개 크기, 약 26만톤의 철광석을 싣고 가던 초대형 광물운반선 ‘스텔라데이지호’는 우루과이 인근 남대서양에서 침몰했다. 사고 당일 한국시간으로 오후 11시 20분쯤 스텔라데이지호는 카카오톡을 통해 선사인 폴라리스쉬핑에 선박 침수 사실을 알리던 중 연락이 두절됐다. 선사가 외교부에 사고발생을 알린 것은 12시간 뒤였다. 폴라리스쉬핑 측은 “선박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시도하고 현지 해난구조센터(MRCC)에 구조요청을 했다”면서도 사고 초기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해 신고가 늦어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외교부는 사고소식을 알게 된 날 사고지점 인근 국가인 우루과이와 브라질에 수색 비행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복잡한 승인 허가를 거쳐 수색이 시작된 것은 2일 오후 4시 30분이었다. 그 사이 한국인 선원 8명과 필리핀인 선원 14명이 실종됐다. 필리핀인 선원 2명만 수색 시작 전날인 1일 지나가던 선박에 구조됐다. 결국 선사와 정부 모두 ‘골든타임’을 놓친 셈이다. 때문에 사고는 초반부터 세월호 참사와 비교됐다.

화물선 '스텔라데이지호’가 우루과이 인근 해역에서 연락 두절된 지 이틀째인 지난 4월 2일 실종 가족이 부산 중구 중앙동 폴라리스쉬핑 부산지사에 마련된 비상대책본부에서 설명을 듣던 중 눈물을 훔치고 있다. 부산=전혜원 기자.

스텔라데이지호가 25년된 개조 선박이었다는 점도 세월호와 유사하다. 세월호는 18년 된 일제 퇴역여객선을 개조한 배였다. 이렇게 오래된 배를 수입할 수 있었던 것은 2009년 이명박정부 당시 해운법 시행규칙 개정을 통해 여객선 선령 제한을 30년으로 늘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후 정부는 안전규정을 강화해 화객선 선령 제한을 25년으로 낮췄다. 그러나 스텔라데이지호 같은 외항 화물선은 선령 제한이 없다.

재용씨는 스텔라데이지호에 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았다. 영주씨는 동생이 지난해 출항 전 친구에게 ‘이 배(스텔라데이지호)는 잔고장이 많아서 타기 싫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을 나중에 들었다. 영주 씨는 동생이 승진을 위해 일부러 참고 배를 탔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지난해 동생은 ‘내 인생 마지막 공부’라며 이를 악물고 공부해서 1등 항해사 자격시험에 합격했어요. 어려운 시험도 붙었고 승진이 코앞이니 ‘이번 한번만 참자’며 배를 탔겠죠. 차라리 시험에 떨어졌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

한국에서 약 2만㎞나 떨어진 바다를 수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폴라리스쉬핑이 자사 배와 임대한 구조구난선을 투입해 한 달여간 수색했고 정부 역시 우루과이ㆍ브라질ㆍ미국 등에 도움을 요청해 항공수색을 했다.

하지만 사고 초기 정부 자산을 투입한 수색이 미흡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족들이 확실한 재수색을 요청하는 이유다. 경주씨는 “사고 당시 근처에 한국 쇄빙선인 아라온호가 있었어요. 이것을 뒤늦게 알고 해수부에 따졌더니 ‘쇄빙선은 구조가 안된다’더군요. 그런데 아라온호는 2011년 러시아 조난 어선을 구조한 적이 있습니다.” 가족들은 위성, 군함 등 여러 방법을 직접 찾아 제안했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투입이 어렵다’는 답변만 받았다.

국민 단 한 명이라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선사와 정부의 수색이 중단된 것은 5월 9일. 새 정부가 들어선 뒤 6월 26일부터 수색선을 재투입했지만 그마저도 7월 11일에 중단됐다. 그렇지만 가족들은 사고 초반 발견된 것으로 짐작되는 구명벌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

수색 일주일째인 4월 9일, 사고 해역 주변 300m 상공에서 실종 선원을 수색하던 미군 초계기가 해수면에서 구명벌로 보이는 주황색 물체를 발견했다고 수색 리더선인 ‘스텔라코스모호’에 알렸다. 이 소식은 가족들에게 큰 희망이었다. 구명벌에는 비상식량과 의약품 등이 있어서 선원들이 거기에 탔다면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구조된 두 명의 선원 역시 구명벌을 타고 있었다.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 다음날인 4월 1일 발견된 필리핀인 선원 2명은 주황색의 구명벌을 타고 있었다. 가족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한 척의 구명벌에 선원들이 생존해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대책위원회 제공.

하지만 다음날 폴라리스쉬핑은 미군이 발견한 것은 ‘기름띠’라고 밝혔다. 가족들은 정부의 추가 확인을 재차 요청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 주황색 물체 발견 당시 미군이 기록한 사진을 다시 확인하는 것, 그것이 정말 구명벌이었다면 그 행방을 다시 한번 수색하는 것. 가족들의 바람이자 하승창 청와대 사회혁신수석이 천명한 ‘문재인 정부 1호 민원’이다.

“구명벌이 16인승이어서 실종자들 모두가 탈 수 없어요. 거기에 탄 것이 동생이라는 보장도 없고요. 하지만 한 두명이라도 아직 바다에서 버티고 있다면 끝까지 찾아야 하잖아요.” 영주씨는 문 대통령이 후보시절 ‘안전 때문에 눈물짓는 국민이 단 한명도 없게 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기억한다. 그들이 지난 7월 청와대 인근 청운동 주민센터앞에서 농성을 한 것도, 같은 달 강경화 외교부장관을 만난 것도 이 때문이다.

경주씨는 “만약에 그때 발견된 것이 구명벌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선박을 타고 다니는 선원들을 대상으로 사고 원인조사를 하는 것이 정부가 할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과 달리 정부의 노력은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이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실종자 재수색 및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박고은 PD.

가족들은 수색 재개를 요청하는 10만명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와 유엔에 전달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6만여명의 서명을 받았다( 온라인서명 바로가기 ). 하지만 집을 떠나 매일 광장을 지키는 것은 녹록치 않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사회가 성숙했다지만 일부 시민들이 가족들의 바람을 ‘떼쓰기’로 매도하는 것도 여전하다. 인터뷰 당일에도 가족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소리치는 행인과 언쟁을 벌였다.

그럼에도 영주씨는 고생이 헛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서명을 하러 온 분이 ‘주변사람 10명에게 스텔라데이지호 사고를 아냐고 물으면 한 명밖에 모른다’며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 말이 너무 감사했어요. 4~5월만 해도 이 사고를 아는 분이 100명 중 1명이었거든요.”

가족들이 이렇게 버틴 것은 자리뿐 아니라 마음까지 내어준 세월호 가족들 덕분이었다. “세월호 어머니들이 우리를 만나면 꼭 안아주시는데 그때마다 ‘이 분들도 3년 반을 기다렸는데 나의 반년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용기를 얻습니다.” 영주씨의 말이다.

스텔라데이지호 사고, 세월호 참사. 경주씨는 시민들이 이 사건을 ‘남의 일’로 보지 않기를 호소했다. “저희도 불과 몇 달 전까지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던 평범한 시민이었고 이런 일을 겪게 되리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그럴 일 없어’ 라며 지나치는 대신 언제든 비슷한 사고가 날 수 있다고 한번만 생각해보기를 부탁합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박고은 PD rhdms@hankookilbo.com

신현욱 인턴PD 417pa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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